[스포트라이트]
서른여덟, 잔치는 시작됐다,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탁재훈
2005-09-15
글 : 김수경
사진 : 오계옥

탁재훈은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밴드에서 기타를 쳤지만, 그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기억은 단 한번도 없다. 연극영화과에 낙방한 그는 무엇에 홀린 듯이 충무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약관의 탁재훈은 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한다. 에로풍 사극 <마님>에서 연출부 막내, 일명 ‘인간 심부름센터’의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민속촌 촬영이 있던 어느 날, 감독은 그에게 5만원을 내밀었다. 여러 차례 사양 끝에 지폐를 받아쥐고 감독님의 온정에 감동했던 탁재훈은 그때는 몰랐다. 그게 용돈이 아니라 두달치 월급인 줄은. 제대한 탁재훈은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다. 천호동 근처 공사판에서 리어카를 끌며 인부들의 밥을 나르던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나상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혼자 뜨는 달>. 주인공 친구 역을 맡은 탁재훈은 “매일 감독과 촬영감독이 하도 싸워서” 현장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탁재훈은 1995년에 데뷔앨범 <내가 선택한 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비포장 국도였다. “서태지, 김건모, DJ-DOC 등 난리도 아니었던 상황” 때문에 그는 매니저와 둘이 전국팔도를 누비며 1년 내내 행사에만 끌려다니다 활동이 끝나버렸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내놓은 2집은 한술 더 떴다. “음반을 내고도 PR, 방송 한번 못하고” 넋이 빠진 채 기다리기만 했다. 점입가경으로 3년의 슬럼프가 그에게 닥친다. 그리고는 서른이 된 탁재훈에게 가수 이상민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정환이도 노니까 둘이 한번 같이 해보라”는 것이다. 계속 거절하던 탁재훈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동의한 이유는 “계약금을 250만원 더 준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컨츄리 꼬꼬. 앨범이 나오자 솔로 때와 상황은 똑같이 돌아갔다. “중고신인 운운하며 방송도, PR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9개월이 그냥 흘러갔다. 그러다가 간신히 잡은 기회가 <좋은 친구들>의 게스트 출연. 그날 대기실에서 탁재훈은 신정환에게 “형 오늘부로 그만 할 거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미친 척했던 방송은 ‘터졌고’ 그들은 1년 내내 “기절한 상태에서 매니저에게 업혀 새벽 5시에 들어오고, 아침 7시에 업혀나가기”를 반복했다. 탁재훈의 설명에 따르면 “5년간 1250만원으로 계약했던 컨츄리 꼬꼬는 회사에 아마 100억원은 벌어줬을 것”이란다.

인생역정을 청산유수로 펼쳐놓는 탁재훈은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농담이 줄어들고 말투가 느려지며 냉정하게 자평한다. 그 순간에는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에서 능청맞게 사방에 ‘나무를 심으러 다니던’ 장석재도, 브라운관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말발의 제왕 탁재훈도 스르르 사라진다. “사실 제작사에서는 다른 사람을 쓰려 했다. 시험삼아 연락했다가 나에게 완전히 코가 꿴 것”이라는 게 이번 캐스팅의 전말이다. 처음 리딩하던 날 그는 시나리오도 안 읽고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열심히 연습을 해서 뭔가를 보여줬는데도 안 웃기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장석재는 굉장히 릴랙스하게 가는 캐릭터니까”라고 그는 판단했다.

<가문의 위기>의 장석재가 구사하는 남도 사투리는 단어 하나하나의 정확성보다는 리듬과 분위기를 중시한다. 탁재훈은 정확히 발음하는 조금 딱딱한 정조의 사투리와 모호하지만 전자보다 듣는 사람에게 리듬이 잘 느껴지는 사투리를 즉석에서 대조하며 이를 설명했다. “그 동네 출신이 아니라면 중요한 건 감정과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다. 학원 다니듯 배워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편 그는 “니마이와 산마이를 오갈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라고 이야기한다. 가부키의 배역 구분에서 비롯된 단어인 전형적인 미남 니마이메(二枚目)와 익살스러운 광대 산마이메(三枚目)를 아우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짜 배우다. 방송, 특히 예능으로 단단한 입지를 다진 그는 “영화 한편 끝내고 나니 아주 후련하고 시원하다. 사실 방송은 소모적이고 슬퍼지는 게 있다”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연기할 때마다 너무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역이라도 또라이처럼 할 자신이 겨우 생겼다”는 것이 <가문의 위기…>로 그가 얻은 재산이다. 소율과 유단의 아버지이자 서른여덟살인 탁재훈은 때늦게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훨씬 냉철하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 나이에 은막의 톱스타를 꿈꾸느냐, 격려 차원이 아니라면 나는 당신에게 잘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선언했다. 그것은 영화에 전념하고 싶은 그에게 전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냉정한 충고이다. “영화는 일종의 몰래카메라다. 우리가 늘상 궁금해하는 옆집이나 윗집은 뭐하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게 슬픔, 분노, 사랑 무엇이든”이라는 불혹을 앞둔 충무로키드는 지금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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