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고다르의 영화동지, 장 피에르 고랭
2005-09-15
글 : 김수경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우리의 목표는 가치의 재발견이었다

68혁명의 중심에서 고다르와 함께 영화집단 지가 베르토프 그룹(이하 DVG)을 이끌었던 장 피에르 고랭 감독을 지난 9월6일 명동에서 만났다. <르몽드> 문학기자 출신인 고랭은 <동풍> <이탈리아> <만사형통> 등을 고다르와 함께 각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전복의 영화정치학’을 추구했다. 그는 1974년 <여기 그리고 다른 곳>을 끝으로 고다르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그가 말하는 68, DVG와 고다르.

-처음 영화에 입문한 동기는.

=장 마리 스트라웁의 <타협할 수 없는>의 결말에 독일어로 말하는 대목이 있다. 너무 감동적이라 영화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마치 내가 독일어를 아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을 마치 내가 아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이창동의 <박하사탕>과 <초록물고기>를 보며 ‘한’을 안다고 느끼듯이.

-고다르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는가.

=고다르가 <중국여인>을 만들기 직전이었다. 당시 <르몽드>의 영화비평가 이본느 바비가 우리의 만남을 주선했고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영화사가 조르주 사둘도 동석했다.

-<만사형통>은 사실상 DVG의 마지막 작품처럼 보인다. 특히 상업성을 통해 상업영화를 전복하려는 방법론이 흥미롭다.

= 장 앙리 호제와 폴 부봉이 참여했던 시기를 지나, <프라우다>와 <동풍>이 만들어진 1969년에 DVG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만사형통>은 다시 전통적인 영화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꾀했다. 스타 캐스팅 같은 요소로 상업영화의 메커니즘을 역공한다는 지적은 합당하다. 흔히 사람들은 DVG를 규칙과 규범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우리의 목표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기존의 모든 관점을 전복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68혁명 때 존재한 다른 정치집단 혹은 그룹과 DVG의 차이는 무엇인가.

=DVG는 순수하게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집단이 되고자 했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영화 지형은 세 갈래로 나눠진다. 대중추수적인 정치영화, 냉전적 의식에 기반한 후기 스탈린주의적 영화, 다큐멘터리 타입의 투쟁영화가 그것이다. 이 세 유형의 영화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이 <동풍>이다.

-<여기 그리고 다른 곳>을 끝으로 고다르와 공동작업은 막을 내렸다.

=모든 그룹은 영원히 존재하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다르와 나는 그때 서사적 구조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고다르는 내러티브를 원죄나 종교로 여겼다. 한편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197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매니 파버의 추천으로 파스빈더의 영화 <사계절의 상인>을 보고 그걸 체감했다.

-그래서 <포토와 카뱅고>를 만든 것인가.

=<포토와 카뱅고>는 말 그대로 파스빈더와 고다르 사이에서 질문하는 영화다. 그 영화가 로테르담 프리미어에서 상영되었고 나는 파리를 향했다. 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장 마리 스트라웁, 고다르, 다니엘 위예가 ‘너무 훌륭한 영화’라고 축하해줬다.

-당신은 현재 감독이기도 하지만 강단에 선 교육자다.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칠 때 무엇에 주안점을 두는가.

=교육은 학생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그 학생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요리의 레시피를 알려주듯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을 차단한다. 그걸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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