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3일 개봉하는 <너는 내 운명>은 언뜻 시대를 잘못 찾아온 영화처럼 보인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 게다가 에이즈 보균자이기까지 한 여자와 그녀를 한없이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이 영화는 ‘지고지순’, ‘신파’, ‘정통 멜로’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부터 21세기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멜로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궁금했던 <씨네21>은 세 차례에 걸친 촬영현장 방문 기회를 마련했다.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이 처음으로 만드는 장편 ‘상업영화’ 현장에 대한 궁금증과 전도연과 황정민, 두 연기파 배우의 생생한 모습을 보는 것도 방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요한 장면을 엿봤다 해도 고작 세번의 탐방만으로 온갖 의문을 잠재울 수는 없는 법. 결국 9월6일의 기자시사를 통해 그 결과물을 최종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작을 보니 현장에서 얻은 정보와 느낌도 비로소 정리가 됐고, 일말의 우려 또한 가시는 듯했다. 따라서 이어지는 글은 현장을 통해서 영화를, 영화를 통해서 현장을 들여다보는 ‘2원중계’가 될 것이다. 이 ‘가을영화’에 숨겨진 봄과 초여름 현장의 따사로운 햇살을 전한다.
# <너는 내 운명> 에피소드Ⅰ: 두 배우, 새로운 희망
2005. 4. 6∼7 경북 영주시 부석읍 순정다방 오픈세트
“난 너와 같은 차를 타고/ 난 너와 같은 곳을 보고/ 난 너와 같이 같은 곳으로/ 그곳은 천국일 거야….” 풍기에서 부석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온 지 30분 만에 도착한 부석 읍내, 초입의 삼거리에서부터 싸이의 발라드곡 <낙원>이 들려온다. 음악소리는 촬영장으로 갈수록 커지더니, 마침내 이 ‘소음’의 진원지가 다름 아닌 촬영현장, 하고도 감독 모니터 바로 앞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촬영이 멈출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는 박진표 감독은 아예 CD 플레이어와 연결된 소형 앰프를 자기 발끝에 두고 있다. 안수현 PD에 따르면, 이 노래는 <너는 내 운명>의 시나리오를 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너와 함께 같은 곳에 있으니 여기가 천국 아니겠냐’는 가사니 어찌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랴. 붕붕거리는 비트에 맞춰 구부정한 몸을 끄덕거리는 박진표 감독의 옆에는 막 점심식사를 마친 전도연과 황정민이 앉아 있다. 중요한 대화는 아닌 듯하지만, 자칫 참견했다간 미운털 박힐까 싶어 조용히 촬영장인 다방 내부로 들어간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도연이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안수현 PD가 슬쩍 두 남성 기자를 자극한다. 방금 전까지 전도연이 엉덩이를 흔들었다는 다방 세트장은 실제로도 다방이다. ‘후원다방’이란 간판을 ‘순정다방’으로 바꿔 달고, 어항을 들여놓았을 뿐이란다. 지붕에 기와가 올라가 있고 창문에 선팅을 하지 않은, 그리고 앞뜰이 있는 독채 건물의 1층 다방. 감독이 원했던 순정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품은 이곳을 발견했을 때 그 스탭은 환호를 질렀을 거다. 영화에서 이 공간은 석중과 은하가 사랑을 싹틔우는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석중은 이곳을 매일같이 출근해 자신의 굳은 사랑 의지를 드러내며, 황 마담(고수희)과 규리(서주희)는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준다. 들창 밖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아니 대형 조명기의 광채가 여독을 자극할 무렵, 오후 촬영이 시작된다.
14번 신, 석중(황정민)이 직접 짠 우유를 은하(전도연)에게 선물하고 운세를 뽑는 장면이다. 조명팀마저 귀에 이어폰을 낀 채 작업을 해 유난히 조용한 촬영장이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인근 다방을 다 뒤져서 구해왔다는 운세 자판기에서 운세 종이를 뽑은 황정민이 어눌한 말투로 대사를 한다. “무지개를 좇으면…” 순간, 전도연이 그의 말을 날렵하게 가로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 그거 만날 똑같아요, 순 사기야, 사기….” 영락없는 다방 ‘레지’ 말투다. 그러고보니 옷 입은 품새나 행동거지가 실감난다. 모니터를 보던 박진표 감독이 “다방에 취직해도 되겠다”는 말을 할 정도다. 체중을 15kg 정도 찌우고 얼굴을 검게 태운 황정민도 시골 총각 티가 팍팍 난다. 이날과 다음날 찍은 분량은 모두 석중과 은하가 서서히 사랑을 꽃피우는 대목이다. 석중이 준 우유를 버리면서도 은근히 즐거운 은하의 모습이나, 은하가 석중에게 과일주스를 갈아주는 장면 등. 남은 촬영 스케줄로 보면, 머지않아 이들의 사랑은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이 같은 앵글 안에 등장하는 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전도연과 황정민의 러브러브 화학방정식
전날 전도연에게 “우리 봄날도 머지않았네, 어떡하니?”라고 말하며 때이른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황정민은 전도연과 함께 출연하게 된 것에 큰 만족을 표한다. “상대역이 전도연인데 어느 누가 안 좋아하겠나. 매번 촬영장에 나올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전도연도 “황정민은 집중력이나 여러 능력이 두루 있는데다 노력까지 하니 천하무적일 것 같다. 그런 게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지만, 자극도 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칭찬은 절대 ‘접대성’이 아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너는 내 운명>은 최근의 한국영화 중 배우의 힘이 가장 크게 발휘된 작품이라 할 만하다. 두 배우는 정말 은하와 석중인 것처럼,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경계를 지우면서 관객을 스크린 안으로 빨아들인다. 일단 그들의 살림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진정?”이라는 전도연의 말투에 매혹될 수밖에 없고, 목에 라디오를 건 채 은하에게 왁스의 <오빠>를 들려주는 황정민에게 애틋한 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대사는 내가 얼마나 좋아? 하늘만큼 땅만큼, 이런 식으로 진짜 유치한데, 배우들이 살아 있는 말로 해주니까 쾌감이 생기는 거다”라는 박진표 감독의 말처럼 사랑에 목을 매고, 이별에 목을 놓는 신파형 캐릭터가 배우를 잘 만나 설득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리거나 촬영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박진표 감독의 여유로운(듯한) 모습도 상당 부분 배우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전도연이어야 할 것 같았다.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느낌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때론 섹시하고, 때론 촌스럽고, 때론 사랑스럽고, 그런 와중에 악녀성이 발휘되는. 황정민도 <로드무비>를 봤을 때부터 꼭 함께하고 싶었던 배우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거저먹고 있는 거다. 배우들이 저렇게 잘해주니까.” 두 사람의 연기를 위해 영화 들어가기 전 박진표 감독은 두 배우에게 한 가지 특별한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 사랑 이야기를 찍으면서 부디 내 마음에 질투심이 생길 정도로 연기해다오.” 그리고 4월6일 밤, 감독은 기자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무지하게 질투하고 있다.”
이날 촬영장을 찾은 제작사 직원이 박진표 감독에게 CD 한장을 건넨다. <달콤한 인생>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이다. 곡명이 적힌 CD 뒷면을 보던 감독이 냉큼 한곡을 선택해 크게 튼다. 황정민이 직접 부른 <A Honeyed Question>이 박진표 감독의 무전기를 통해 다방 안으로 중계되자 스탭들은 환호를 지르고, 전도연 앞에서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연기를 준비하던 황정민은 얼굴이 벌게진다. 전도연은 “너어무 잘한다. 오빠 우리 영화에서도 노래 불러요”라고 말한다(실제로 <너는 내 운명>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전도연과 황정민이 부르는 <유 아 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이 흘러나온다). 반복해서 계속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제발 꺼달라며 버둥대던 황정민은 감독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곤, “노래 들으면서 지금의 이 쑥스러운 기분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굴복한다. 그래서일까, 전도연의 “인제 장가만 가주면 되겠네…”라는 대사에 “네?”라고 답하는 황정민의 얼굴은 더욱 빨개 보인다. 그런 황정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전도연의 눈길이 애정으로 그득하다. 반면 이 모습을 보는 스탭들의 눈에는 질투심이 서려 있다. 때마침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 차가운 봄비가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외롭게 만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