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편의 영화로 천국과 지옥을 다 맛봤다면, 그건 배우에게 행운일까 불행일까? 김태연(23)은 데뷔작 <거짓말>로 국제 무대에 서는 행복과 분신 같은 영화가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불행을 동시에 겪었다. 서럽게 울면서 흠씬 맞아가면서 영화를 찍기는 괴로웠지만 그러면서 자기 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재능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김태연은 미지의 배우다. 유일한 영화 출연작인 <거짓말>은 등급보류로 관객과의 만남을 봉쇄당했고, 유일한 TV드라마 출연작인 <러브 스토리>는 아직 촬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이 세계 유명 여배우들과 나란히 이탈리아판 <엘르>에 실렸고, 일본 화장품CF의 오디션 제의를 받았으며,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한국영화 유망주로 거론되고 있다.
배우에게 데뷔작이 은막으로 가는 통과의례라고 한다면, 김태연은 꽤나 수고로운 제의를 치른 셈이 된다. <거짓말>에서 그가 그려낸 Y는 결단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극단의 <거짓말> 시나리오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한번쯤 Y 같은 인물을 표현해 볼 수 있다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자 머뭇거릴 게 없었다. 그래도 극단의 사도마조히즘으로 치닫는 섹스에 탐닉하는 여고생 Y를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감독님 앞에서 막 울면서 왜 이렇게까지 찍어야 하느냐고 소리소리 질렀어요. ‘감독님, 지금 변강쇠 찍어요’, 그런 소리도 했어요. 영화의 3분의 2를 찍을 때까지 그랬는데, 나중엔 괜찮았어요. 때리는 것도 때릴 만하고.” 장선우 감독은 그의 감정을 풀어놓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감독이 원하는, 그 자연스러움을 찾아가면서 그는 연기를 배웠다.
TV로 옮겨오자 또다른 연기가 요구됐다. “드라마는 빨라서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요. 순발력 있게 집어내지 못해서 NG도 많이 내요. 기교가 필요해요. 카메라를 의식하는 법도 배워야 하구요.” 그는 자기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러브 스토리>가 끝나면 잠시 연기를 쉴지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린 보스의 딸로 세상에 냉소적인 형사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미대 휴학생이 <러브 스토리> 제5화 ‘로즈’에서 그가 영혼을 떼어줄 인물이다.
김태연이 배우가 된 걸 스스로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튜디어스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항공운항과에 다니다 의상학과 졸업발표 무대에 한번 서보고는 대뜸 모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에 따르면, 모델과 배우는 “얼굴 표정, 몸 동작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만나고 “영화는 한정된 공간과 상황에 갇혀 있다면 모델은 끊임없이 변신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헤어진다. 그 다름에 끌려 그는 앞으로 연기와 모델일을 같이 짊어지고 가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변덕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낸다”고 한다.
<거짓말>을 위한, 진실을 위한 “베니스영화제에 가서 처음 느낀 건 거기 온 사람들이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거였어요. 근데 한국에서는 <거짓말>을 불법으로 유통시켜 보면서 호기심만 충족시키고 하잖아요. 왜 그러는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젠 기다림에 지쳤어요. 빨리 제대로 된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요. 촬영하면서는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영화가 완성된 뒤에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자기 영화를 잘 설명하는 것도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우울하고 싶은, 망가지고 싶은 “예쁘고 발랄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인물에게는 매력이 안 느껴져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퐁네프의 연인들>의 줄리엣 비노쉬를 보세요. 망가졌지만 매력있잖아요. 우울한 느낌이 좋아요. 그게 나에게 잘 맞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