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영화 밖 아이들은 ‘초콜릿’ 만 먹고 크진 않잖아
2005-09-22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찰리와 초콜릿 공장>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서 약간의 혼란이 왔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 순종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초콜릿 포장지에서 황금티켓을 찾아내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 들어간 다섯 명의 아이들 가운데 마음씨 착한 찰리를 제외하고는 가차없는 징벌을 당한다. 무모하게 먹는 걸 밝히는 소년, 원하는 걸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소녀, 맹목적인 경쟁심에 불타는 소녀, 그리고 늘 잘난 척하는 소년이 그들이다.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한 이들이 사라질 때마다 영화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울려퍼지고 공장주인 웡카의 얼굴에는 측은함은커녕 쌤통이라는 감정만 읽힌다.

이런 내용이 언뜻 아이들에게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부추기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벌을 받는 아이들을 보면서 웡카 못지 않게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망연한 표정을 짓는 부모들을 보면서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한 술 더 떴다. 자식이 없어서 부모 마음을 모른다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때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받는 카드를 비롯해 언제 어디서나 어른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돼라는 말만 지겹도록 듣던 어린 시절을 잊어버렸냐 반문해도 할 수 없다.

디즈니표로 대표되는 ‘아이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어린이 판타지’가 거북하다. 그 판타지는 아이들은 모두 선하고 꾸밈없다, 고로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이기심은 단지 ‘철이 없어서’일 뿐 어른들의 잘못만큼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의 시선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사랑, 사랑뿐이고 아이들에게 시련이나 상처를 주는 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범죄가 돼버린다. 과연 그런 것일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어린이를 그리는 시선은 이와 다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주인공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른들이 끊임없는 방해물로 등장하고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소년은 일이 안풀리는 주인공 남자의 신경질을 감내해야 한다. “어른 못지 않게 아이들에게도 고단한 일상이 있다”고 말하는 이 감독의 영화에는 그저 예뻐해주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현대의 어린이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짐 캐리 주연의 <레모니 스니캣의 위험한 대결>에서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호는커녕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자신들의 살 길을 찾는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크기도 하지만 결핍과 좌절, 상처를 먹으면서 자라기도 한다는 것이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주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찰리는 가난이라는 시련 속에서 자란 아이다. 반면 네 명의 아이들은 아무런 결핍이나 좌절을 맛보지 않은 아이들이며 웡카가 내린 처벌로 최초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것은 찰리의 손으로 돌아온 초콜릿 공장 못지 않게 큰 선물로 보인다. 영화 속 어린이 세계에 꿈과 사랑은 차고 넘친다. 그 세계가 제대로 구성되려면 오히려 채워넣어야 할 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실패와 좌절이 아닐까 싶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