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애니메이션 <육다골대녀>의 이애림 감독
2005-09-22
글 : 김도훈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악몽? 극복하니까 오히려 즐기게 되더라”

13인의 아해가 애림의 그림을 보오. 장소는 막다른 골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13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애림은 무서운 그림을 그리고 괴이한 애니메이션을 만드오. 장소는 막다른 작업실이 적당하오.

1997년 만화잡지 <나인>의 창간은, 만화인들과 만화 애호가들에게는 <씨네21>의 창간과도 비슷한 사건이었다. 이강주, 박희정, 이진경, 이정애, 김준범, 유시진 등 젊고 의기양양한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순정만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대미문의 작가는 이애림이었다. 사실 ‘순정만화’라는 카테고리로 그를 엮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강간과 살인과 근친상간과 카니발리즘. 붉고 검은 색채로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인체배율의 캐릭터들은 8년이 지난 지금에도 괴이한 생동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실, 이애림은 더이상 언더그라운드 취향의 만화가가 아니다. 그는 <나인>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아 <쇼트 스토리>라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에 참여해 기괴한 일러스트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뛰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상원 졸업작품인 <연분>을 내놓은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에 <육다골대녀>로 참여하며 새로운 애니메이션 작가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디지털 컷-아웃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애림의 세계는 여전히 어둡고 알싸하고 괴이하다. 육(肉)이 다(多)하고 골(骨)이 대(大)한 애니메이션 감독 이애림과의 아.스.트.랄(Astral 다른 차원의, 별세계의) 대화.

-<육다골대녀>의 모델은 본인인가.

=모델은 아니다. (웃음) 모티브만 딴 거다. 아버지가 머리가 좀 크시고 기골도. 저도 뼈가 좀 크다. 어릴 땐 작았는데 살이 찌고 나이가 드니까 뼈가 딱 벌어지더라. 그리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전주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 반응이 열광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쁘긴 했는데 좀 의외였다. 취지는 참 좋지만 차별, 인권, 주제가 조금 어렵지 않나. 잘못하면 계몽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기쁘고… 음… 너무 공식적인 이야긴가? (웃음)

-<육다골대녀>는 디지털 컷-아웃 방식의 애니메이션이다. 특별히 이 기법을 애용하는 까닭은.

=나랑 작업 스타일이 맞다. 혼자서 해야 하는 경우에 퀄리티를 잘 뽑고 작업도 재미있게 하려면 디지털 컷-아웃 방식이 적합하다. 애니메이션은 공동작업이지만, 공동작업을 할 자신이 없다. 작업하는 시간보다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소모하는 에너지가 더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릿속에 있는 걸 100% 말로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렵나. 나는 감으로 작업하는데,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 지적을 할라치면 도저히 근거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게 좋은 듯하다. 물론,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공동작업을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은 있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에 등장하는 일러스트는 어떻게 작업하게 된 것인가. 영화계에 줄이 있나.

=윤재연 감독님이 영상원 한 기수 위 선배다. 친구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분이 직접 부탁해서 참여한 거다. 줄은 무슨.

-영화미술쪽으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물론 생각은 굴뚝 같다. 영화에 워낙 관심도 많고. 사실 한번 제의가 들어오긴 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절했다. 겁이 덜컥 나더라. 앞으로야 제의만 들어와도 황송한 것이고.

-옛날이야기 해보자. 여성만화잡지 <나인>에 단편들을 연재한 게 프로 만화가로서 첫 데뷔인 걸로 알고 있다.

=연재는 처음이었다. 그때가 26살인가 27살인가. 대학 떨어지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집에서는 사회부적응자. 후배들 사이에서는 돈 못 벌고 능력없는 선배. 친구들은 교대에 떡하니 들어가고. 그러던 와중에 도서관에서 그린 만화를 만화잡지 <르네상스>에 보냈더니 아마추어 코너에 덜컥 실려버렸다. 물론 그 이후로는 또 아무도 안 불러주고. (웃음) 그러다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어서 영상원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 들어가서야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당신 만화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듯한 것이었다. 주인공들이 살인, 강간, 근친상간을 벌이고 색채와 화풍은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다.

=사람들에게는 취향이란 게 있다. 옷을 고르거나 가방을 고르거나. 모든 것에 취향이 반영된다. 나 역시 취향이 있다. 내 그림은 눈 반짝 다리 가늘, 이런 취향이 아니다. 제주도에서 성장하면서 보기 힘든것들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잡지를 보면 항상 <살로, 소돔의 120일> 같은 영화가 당겼다. 꿈. 특히 악몽도 많이 꿨고.

-악몽이라니.

=유년기부터 20대 초반까지 1년의 대부분을 악몽을 꿨다.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왜 <반지의 제왕>을 보면 호빗들이 이길 수 없는 절대악 사우론과 맞서야 하지 않나. 바로 그런 기분이다. 꿈에서도 이길 수 없는 것에 쫓기는 거다. 희망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고, 해답도 안 보이는. 그래서 꿈속에서 에라 죽어버려야겠다 하고 자살하기도 했다. 그럼 깬다.

-그런 악몽이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나.

=요즘은 악몽이 점점 줄어들었고, 가위도 예전보다는 덜 눌린다. 극복하니까 오히려 즐기게 되더라. 하여튼 그런 것들이 잡다하게 취향과 섞여서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제주도는 당신에게 어떤 장소였나.

=초현실적인 경험이 많았다. 새로 지은 집으로 가는 길, 전봇대와 큰 나무가 있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길을 걷는데 커다란 까마귀가 성큼성큼 나를 쫓아온 적도 있고. 또 안개가 잔뜩 낀 아침에 일어나면 아름다운 꿩이 마당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적도 있다. 한번은 하얀색 와이셔츠에 피가 묻은 운동권 학생이 죽은 검은 개를 들고 있고, 뒤에는 할머니 한분이 서서 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깼더니 엄마가 개가 죽었다고 하더라. 꿈에서 봤던 검은 개와 똑같은 개가.

-이상한 아이였나보다. 영적이거나.

=아니다. 아주 정상적인 아이였다. (웃음) 근데 그런 경험들을 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것 같지는 않다.

-영향받은 미술가들이 있나.

=마티스를 좋아한다. 색채가 강렬한 그림들을 좋아한다.

-당신 작품들에서도 붉은색과 검정색이 강렬하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색은 꽃분홍색이다. (웃음) 마젠타색이라고 하지. 아, 최근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들이 좋아진다.

-호크니의 작품에는 호모섹슈얼리티가 강한데.

=호크니는 게이 아닌가. 게이 같다. 나체의 소년들을 많이 그렸으니까. 작품이 여성적이기도 하고. 르누아르도 여성적이지만, 그의 작품은 되게 싫다.

-남자보다는 여자를 그리는 게 더 즐거운가보다.

=남자도 좋은데. (웃음)

-그래도 당신 작품에서 정말 매력적인 것은 여자들이다.

=그런데, 내 작품을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 작품들에서 여자가 작업했다는 느낌을 특별히 싣고 싶지는 않다. 사실 난 남자를 그릴 때도 약간 마초적으로 그리지 않나.

-여자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여자 같은 경우, 덩치가 거대하거나 어쨌든 예쁘지는 않게 그린다. 근데 나는 그게 더 예쁘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다 똑같잖나. 꼭 남들과 달라야 하는 건 아니어도 자기에게만 어울리는 게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걸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육다골대녀>의 주인공처럼,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하고 사나.

=어떻게 사는 것 같은가?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지 않나. 직장에 다니다가 때 되면 시집가고, 그렇게 살았으면 고민이 있었겠지.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성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만화를 그리면서 그런 부분이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어릴 때는 종아리가 왜 그리 두껍냐. 뼈가 왜 이리 크냐. 너 남자냐. (웃음) 이런 말을 들으면 자기비하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근데 사람마다 자부심이 다르지 않나. 이건 그냥 난데. 대체 어쩌라고. 지금은 그냥 산다. 나쁜 것 같진 않다. (웃음)

-아름다움이란 당신에게 어떤 것인가.

=취향에 맞으면 다 아름답다. 자연적인 아름다움도 있고 인위적인 아름다움도 있고. 그냥 그런 것들을 보다보면 가장 괜찮다 싶은 게 꼭 있다. 꼭 기괴한 것만이 아니라 무난한 것도 내게는 아름다울 수 있다. (카페에 걸린 패션지를 쳐다본다)

-(패션지 표지모델을 가리키며) 저렇게 마른 여자는 아름다운가.

=나도 한번 말라보고 싶다. (웃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나.

=리처드 윌리엄스의 <욤욤공주와 도둑>과 비틀스를 주인공으로 한 <옐로우 서브마린>.

-빌 플림턴의 작품들은 어떤가.

=빌 플림턴은 싫다. 재미가 없다.

-극영화는 어떤가. 당신의 잔혹한 작품들에는 이탈리안 마카로니 호러영화의 느낌이 다분하다.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를 되게 좋아한다. 마무리는 심심하지만 오프닝이 멋진 <서스피리아>가 제일 좋고, <스탕달 신드롬>은 직접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좋고. <엘 포토>의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와 <야수의 날> <액션 뮤탕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도 멋지다.

-<스탕달 신드롬>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처음 보는 작가의 그림이었는데 보자마자 눈물이 나고 멍해져서, 보자마자 얼어서 쓰러질 뻔했다. 그걸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지 않나. 명화집에 나오는 그림도 아닌데, 고흐나 모나리자를 봐도 별것 아니던데, 유독 그 그림이 좋았다.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잘 보면 여자가 화상을 입은 것 같다. 얼굴이 얼룩덜룩하고 슬픈 표정. 반지를 낀 걸 보니 결혼도 했고, 유복한 집안이고, 한데 수심이 가득하다. 서서 보는 게 너무 힘들고 벅차서 미술관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있었다.

-다음 프로젝트는 <을씨년>이라는 작품이라고 들었다.

=스무살 초겨울에 버스를 타려고 병풍나무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문득 먼 산을 봤다. 그때 갑자기, 아아. 이런 게 을씨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앞날도 불투명하고, 인생도 잘 안 풀리고, 그런 때였다. 그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좀 우울한 내용이다. 저예산으로 작업할 예정이고, 거의 드로잉 위주가 될 것 같다. 물론 보통의 드로잉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미야자키 하야오식으로 하지 않는 한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진다. 제작비도 많이 들고, 노동력도 많이 들고. 그래서 컷-아웃 기법도 함께 쓸 거다.

-<을씨년>은 단편인가.

=아니다. 장편이다. 최소 인력 최소 비용으로 만들 셈이다. 돈을 투자받아서 크게 만드는 건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닌 것 같고. 일단은 그냥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싶다. 다만,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지 않나. 카메라 워크도 현란하고. 내 애니메이션은 카메라가 거의 고정인데, 장편이면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받나.

=최근 작품들은 어릴 적 기억 같은 것으로부터 많이 영감을 얻는다. 젊을 때는 어느 특정 장면, 단 하나의 그림. 하나의 단어 등, 딱 한 가지 오브젝트에서 이야기를 성장시킨다. 그때는 젊어서 머리가 잘 돌아갔나보다. (웃음) 요즘은 내 속에 있는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작품을 한다. 아.스.트.랄.하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내 작업은 내가 좋아야 하는 게 우선이니까. (웃음)

장소협찬 Liquid Lou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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