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와 씨팍’과 마주치다=서울 강남 신사동의 주택가 골목. 2층 단독주택 현관문 위로 문패 대신 ‘제이팀(J-TEAM)’이라고 적힌 간판이 붙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괴상한 두 얼굴이 손님을 맞는다. 포스터 속 ‘조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새끼’ 아치와 ‘무식함이 하늘을 찌르는 놈’ 씨팍이 그들이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워 욕을 하는 아치는 정말로 ‘(양)아치’스럽다.
그 옆으로 ‘작업이 막바지입니다. 모두들 분발해서 유종의 미를 거둡시다. -조범진’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어딘지 결코 녹록지 않았던 그간의 지난함이 담겨있는 듯한 글귀다. 이곳은 조범진(39) 감독이 7년전에 품기 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이 세상 빛을 보기 전 막바지 산고를 치르고 있는 스튜디오 현장이다.
그림들로 도배된 거실=예전에는 거실이었던 곳으로 보이는 공간의 벽은 온통 조그만 그림들로 빼곡하다. 손바닥보다 작은 그림 하나하나가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다. 영화로 치면 콘티와 같은 ‘스토리보드’란다. 주요장면을 그리고 색까지 입힌 이 그림들은 제작과정 전체의 나침반과도 같은 구실을 한다. 2천 커트가 넘는 애니메이션의 거의 모든 장면들을 그렸다고 하니 여간 일이 아니었겠다.
방을 개조한 작업실에 들어가니 아트팀 오동욱(31)씨가 컴퓨터 작업을 통해 각기 따로 그려진 캐릭터와 배경을 한 장면으로 합치고 있다. “캐릭터는 2디로 그렸고, 배경은 3디로 작업했어요. 둘을 그냥 합치면 느낌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3디 배경에 일일이 색깔을 덧칠해 2디 같은 느낌을 살렸죠. 완전히 ‘쌩노가다’였어요. 그래도 실사영화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표현하려면 3디 배경이 제격이에요.”
지하세계의 예술가들=계단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니 빈 책상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연필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캐릭터 원화를 그리는 키애니메이터(‘원화맨’이라고도 부른다) 김학진(33)씨다. “원래 원화맨들이 10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맡은 일을 끝내고 이젠 안나와요. 저만 좀 남은 일이 있어서. 제가 좀 게을러요. 허허.” 머쓱해하는 그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원화맨은 움직임의 ‘키’가 되는 장면들을 그린다. 손을 들어올리는 동작을 표현할 경우, 손을 내린 상태의 첫 장면과 손을 다 들어올린 상태의 다음 장면을 그리는 식이다.
손을 들어올리는 중간 장면들은 동화작가들의 몫이다. 원화맨의 그림을 바탕으로 중간 그림을 그려 팔의 움직임을 만드는데, 중간 그림이 많을수록 동작은 느리고 부드러워지며, 반대로 적을수록 빠르고 과격해진다. 중간 그림을 몇장 그려야 할지는 원화맨이 정한다. 동화는 대부분 외주회사에 맡기는데, 중요한 장면들은 내부 동화작가가 직접 그린다. 지하실 한쪽 방에서 동화작가 2명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원화맨이 되기 위해선 대부분 동화작가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소리 이상의 소리를 위해=영상작업을 마무리짓고 나면 소리를 입히는 작업이 기다린다. 실사영화와 달리 영상을 100% 인위적으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에서 관객의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소리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캐릭터에 목소리를 입혀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각종 음향과 특수효과음, 음악을 적재적소에 넣어 작품을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목소리를 입히는 더빙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목소리를 먼저 연기한 뒤 이에 맞춰 영상을 만드는 선녹음방식은 할리우드에서, 영상을 만든 뒤 나중에 녹음하는 후녹음방식은 일본과 국내에서 많이 쓰인다. 선녹음방식은 목소리와 입모양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등의 장점이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아치와 씨팍>의 경우 주인공인 아치(류승범)와 씨팍(임원희)의 목소리만 먼저 녹음한 뒤 여기에 맞춰 영상을 만들고, 나중에 다른 목소리는 물론 류승범·임원희까지도 최종 녹음을 다시 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아치와 씨팍>은 빠르면 올해 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7년전 기획돼 제작기간만 꼬박 5년이 걸렸다. 2년이면 완성될 거라는 당초 계획은, <마리이야기> 등 블록버스터급 애니메이션의 잇단 흥행참패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투자자들이 속속 떠나가는 등의 악재로 휘청거렸고, 제작비도 갑절 이상인 35억원으로 불었다. 간단한 수치에서도 제작진의 숨겨진 땀과 눈물의 짠내가 물씬 난다. 김선구(34) 프로듀서는 “처음엔 자신만만하게 덤볐다가, 하나하나 깨지면서 배워나갔다”며 “이젠 노하우가 많이 쌓였다”고 말한다. “주위에선 침체된 한국 애니메이션계를 띄워줄 걸로 기대하고 있어요. 시범적으로 내놓은 플래시애니메이션 반응도 좋았고, 무엇보다 대중성 있는 오락물이어서 흥행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우리 애니메이션도 볼 만하다’는 믿음을 관객들에게 심어 국내 애니메이션 부흥의 작은 도화선이나마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