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면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 180㎝나 되는 큰 키와 크고 담찬 눈망울을 투박하기 그지없는 옷차림과 말투 속에 감춘 이 남자는 일반인 같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플래시가 터지자 어색한 표정이 역력하다. 스스로를 촌놈이라 호칭하며 “난 스타가 아니라 직업이 배우인 일반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그러나, 올해에만 이미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천군>으로 관객을 만났고 <너는 내 운명>(23일)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10월7일)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곧 <사생결단> 촬영에 들어갈, 요즘 한국에서 가장 바쁜 배우 황정민(35)이다.
“<너는 내 운명>은 포장되지 않은 사랑, 사랑의 기본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촌스럽고 닭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사랑. 단순한 얘긴데도 묵직한 게 있어요. 석중이라는 배역도 저랑 비슷한 구석이 많아요. 자연인 ‘황정민’과 크게 달랐던 전작들에 비해 캐릭터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너는 내 운명>에서 맡은 역은 아내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우직한 농촌남자다. 자연인 황정민을 떠올리면 ‘황정민스러운’ 인물이지만, <로드무비>의 마초 동성애자에서부터 <바람난 가족>의 위선적인 변호사를 거쳐 <달콤한 인생>의 양아치 백사장까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배역을 맡아왔던 영화배우 황정민을 떠올리면 석중 역시 낯선 인물이다.
“작품은 인연이고 운이며, 배역이란 대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배역이 아닌 대본을 위주로 작품을 선택한다”고 했다. 또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특색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배역들을 맡은 덕에 얻은 ‘색깔 없는 배우’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고맙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배우라면 당연히 색깔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배역이 어떻게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밑그림을 그려놓을 필요는 없죠.”
다양한 것은 그렇다 치고 다작인 듯 느껴지는 필모그래피에 대해 묻자 지극히 황정민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직업이 배우니까, 열심히 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연인 황정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배우 황정민으로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아요.” 다작을 하다 보면 아쉬움도 많이 남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그답게 진중하게 대답한다. “연기는 달리기처럼 기록을 깨야 하고 또 기록을 깨는 데 실패하면 아쉬운 그런 일이 아니에요. 그저 관객들한테 거짓말하지 않고 맡은 배역에 충실하게 캐릭터의 삶을 연기하면 되는 겁니다. 연기 때문에 아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 그에게도 아쉬운 것이 있다. 바로 그를 ‘스타’로 치켜세우는 시선과 언어들. <너는 내 운명> 무대인사 때 쑥스러워서 할 말도 다 못하고 무대를 내려왔던, <천군> 시사회 때는 일반버스를 타고 극장에 왔다던, 스타로서의 자각이 아직 없는 그를 짓궂게 떠봤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스타”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꾸 부담 주면 배우 안 한다”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한다. 배우를 그만두면? “대학 때 무대미술을 했는데 그 기술로 목수가 되든지 음식솜씨를 살려 주방장이 되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