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소녀, 여행을 떠나다, <파랑주의보>의 송혜교
2005-09-23
글 : 박혜명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송혜교를 만났다. TV에서만 봐오던 그를 영화촬영지에서 만났다. 두 남녀 고등학생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멜로 <파랑주의보>는 송혜교의 첫 영화다. <순풍 산부인과>를 거쳐 <가을동화>로 스타덤에 오른 뒤 커리어의 상승 곡선을 그려온 그는, 사진촬영을 약속한 일요일 오후 낡은 여행가방과 모자를 들고 한적한 길 위에 덩그러니, 그렇지만 곧게 서 있었다. 거센 바닷바람이 그의 긴 머리카락을 짓궂게 휘저어놓아도 빙그레 웃으며 머리칼을 조금 쓸어올리거나, 얼굴이 새카맣게 뒤덮이도록 그냥 두었다. 그는 여행을 시작한 사람이다. 자신이 연기자로 커온 집을 떠나 조심스레 타지를 찾은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모니터를 보는 것부터 버릇이 들지 않았다”는 현장에서 오로지 연기가 걱정이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타지의 바람소리보다 선명했다.

스무살이었어요, <가을동화>를 했을 때가. 첫 주연작이죠. 연기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순수하게 연기했던 작품이에요. 주로 지방에서 촬영했는데 그때의 날씨와 냄새의 느낌은 지금도 못 잊어요. 그 정도로 작품에 빠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요즘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저요, 여행왔어요. 태풍이 친 전보(電報)인지 강풍이 집집마다 문을 잡고 흔드는 곳이에요. 지금 거제도에 내려와 있어요.

여행을 조금 늦게 떠나는 셈인가요? 제 생각은 달라요. <가을동화>가 잘되고 나서부터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때 저는 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에 대한 느낌도 모를 때였으니까요. 요만한 TV에서 연기하기도 버거운데 이만한 스크린에 나와서 느낌도 없는 연기를 보여주기가 많이 싫었어요. 뭐든 알고난 다음에 하고 싶었어요. <풀하우스> 찍기 전까지도 영화는 나와 다른 세계에 있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 궁금해진 거예요. 내가 저기 나오면 어떨까. 단순히 그게 궁금했어요. 이제는 사랑도 해봤고, 지금 이 나이 때의 모습을 남겨보고 싶기도 해요. 조금 더 늦으면 여행을 떠나는 게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다행히 드라마 몇편도 좋게 끝났잖아요. 아, 지금이 적당한 때겠구나. 그래서 조심스럽게 짐을 꾸렸어요.

많이 좋아하죠, 여행. 뭔가를 꼭 얻어오거든요. 그림을 보고 오면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뮤지컬을 보고 오면 나도 언젠가 뮤지컬을 해볼까 싶어져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 마음에 품어보지 않았던 것들. 그런 것들을 얻어와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여행은 생각의 폭을 넓힌다고. 참, 여행을 가더라도 쉽게 갈 수 있는 곳보다 쉽게 갈 수 없는 곳들이 더 아름다워요. 기억에도 오래 남고요. 여행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다들 저보고 무데뽀라 그래요. 가지 말라는 곳도 전 그냥 가요. 가고 싶으면 가야 해요. 이번 여행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누가 뭐래도, 어떻게든 시작했을 거예요.

저는 뭐든 제 기준으로 해요.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데뷔 초에 청소년드라마 주인공 역할이 들어왔었어요. 당시 저한테는 너무 큰 역할이었죠. 그저 감사히 생각하고 하면 되는 거였어요. 신인이고 얼굴 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그 어린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들던 걸요. 괜히 청소년드라마 했다가 어린 이미지가 콕 박혀버리면 나중에 성인 연기할 때 힘들 텐데, 하고요.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처지는 아니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오디션장까지는 갔죠. 하지만 나 못하겠다고, 매니저에게 얘기하고 그냥 나와버렸어요. 열일곱이었어요, 그때.

그때는 키가 작다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지금은 알죠. 그게 내 모습이라는 걸. 다들 알잖아요. 송혜교는 키 작고 아담한 아이. 더이상은 콤플렉스가 아니에요. 얼굴은요, 어떤 선배분이 얘기해주신 건데, 제가 이렇게저렇게 다양한 역을 하기 좋은 얼굴이래요. 청순하게 해놓으면 청순해 보이고 야하게 만들면 야해 보이고 촌스럽게 해놓으면 또 촌스러워 보인다고. 그런 얼굴이라 연기에 방해가 되진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듣기 좋았어요. 제가 봐도 무난한 것 같아요. 눈만 봐도, 아주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지도 않아요.

실은 다른 걸 해보고 싶었어요. 예쁜 연기는 제가 너무 많이 했던 거잖아요. 물론 차분한 역할도 종류별로 있겠지만 제가 베테랑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하면서도 재미가 없어요. 연기 잘하시는 선배님들과 같이 하면서 배워가며 할 생각도 있었고요, <올드보이>의 강혜정씨처럼 강한 캐릭터도 좋다고 생각해요. 정말 다른 걸 원해요. 못해서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은 제가 귀여워서 좋으신 거죠? 그 이미지를 벗고 싶어요. 그렇지만 갑작스러우면 다들 거부반응을 보이실 테니 안 되겠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나이답게만 보여도 좋을 거예요, 그죠? 여배우는 ‘여자’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지금도 예전 모습에 비교하면 많이 여자가 됐어요. 사랑이라는 감정도 아는, 스물다섯이라고요.

첫 영화는,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이것을 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물려야 하나. 일주일 내내 잠을 설쳤어요. 그렇게 못 자는 애가 아닌데도요. 솔직히 아직도 적응이 안 돼요. 간단한 것들도 어렵더라고요. 조그만 TV에서는 잔동작들이 잘 안 보이지만 스크린에서는 크게 보이니까 자제해야 하고요, 얼굴 윤곽이 크다보니까 조금만 과장해도 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감독님이 그러세요. 그런 걸 다 생각하면서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촬영 마치고 돌아와도 내내 찜찜한 거예요. 개운한 기분은 하나도 없고. 제대로 하고 온 건지, 감정 연결을 말끔히 한 건지. 아냐, 거기서 좀 이상했던 것 같아. 밤새도록 생각해요.

어디 도망가 있을지도 몰라요. 내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기는 처음이니까요. 크리스마스 때 개봉한대요. 쑥스럽겠죠? 떨릴 테고요. 그런데 그 떨림과 긴장의 감정도, 상상해보면 기대가 돼요. <파랑주의보> 현장에서 받는 느낌이 <가을동화> 때의 느낌과 많이 닮았거든요. <가을동화>를 이맘때쯤 찍었어요. 지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것도 비슷하고, 배우들과 현장에서 어울려 지내는 모습도 그래요. 첫 드라마 주연작은 잘됐는데 같은 느낌이니까 첫 영화도 잘되겠지, 혼자 위안도 해요. 하핫. 만약 잘되지 않더라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영화만 하고 싶어요. 영화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찾을 때까지는요. 이번 여행은, 그때까지 끝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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