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오! 또 졸고 있으면 어떡해잉?” 희경이 짹짹거리는 소리로 승우의 단잠을 깨웠다. “왜 또 난리야, 이 마누라야! 중국집에서 빵집으로 업종 전환을 했으면, 그만큼 좀 교양 있어져야 할 거 아냐?” 승우는 진저리를 치며 ‘빠리빠리 베이커리’라고 적힌 빵 봉지를 희경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아 이거 치워. 교양? 장사되는 꼬라지를 보고 교양 타령을 해라! 이거야, 빵에 들러붙은 게 건포돈지 파린지 알 수가 없잖아.” “낸들 알아? 처음엔 좀 되더니, 이젠 안 팔린 빵 먹느라고 뱃대지에 밀가루살만 붙어버렸잖아.” “그러니까, 연구를 해야 된다고. 왜 우리가 이렇게 파리를 날리는 줄 알아?” 그러면서 희경은 가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가게 안으로 몰아닥치자, 승우는 몸서리를 치며 소리질렀다. “아 뭐야, 추워 죽겠는데.” “저쪽 건너편에 보여? ‘아메리칸 파이’라는 가게.” “파인지 파린지 그게 우리랑 뭔 상관야?” “무식하긴. 유사 업종이잖아. 저 집 말야. 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데, 파이 맛이 그렇게 죽여준대. 특히 젊은 여자애들이 죽고 못 산다는구만. 당신, 오늘 저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맛의 비결을 알아내!”
마누라님의 특명을 받고 어줍잖은 선글라스로 변장한 승우가 ‘아메리칸 파이’에 들어섰다. 소문대로 젊은 여자애들이 히히덕거리며 파이를 사가고 있었다. “지미, 기브 미 원 모어.” 여자애들이 꼬부라진 소리로 아양을 떠니까, 젊은 미국인 주인이 웃으며 파이를 건네주었다. ‘아니, 저런 년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다니까. 아이엠에프가 괜히 온 줄 알어’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었지만 마누라를 생각해 참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나름대로 혀를 꼬부리며 주인을 불렀다. “헤이, 카몬!”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지미가 달려와 메뉴판을 내민다. “뭐 드릴까요? 아저씨.” 이 자식 그래도 한국말을 좀 배웠네. 그럼 나의 멋진 영어 솜씨를 보여줄 필요가 없잖아, 험험.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파이 하고, 그 마실 것 좀 가져와봐.” “우유나 오렌지 주스 드릴까요?” “그런 애들 먹는 거 말고, 시원한 맥주나 한잔 주라고.”
잠시 후 지미가 파이와 맥주를 가져다 주었다. 승우는 우선 파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반죽은 별로 다른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파이 껍질을 조금 떼어서 먹어 보았다. 역시 별거 아닌데. 그럼 앙코에 금이라도 넣었나? 승우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파이 가운데를 푸욱 찔러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잼이 손가락을 감싸왔다. 오호 멋진 기분인 걸. 승우는 부드럽게 손가락을 돌려 구멍의 크기를 넓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얀 잼이 묻어 올라왔다. 승우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잼을 입 안에서 녹여먹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이 오묘한 맛은 도저히 농산물에서 나올 수 없는 맛인데. 이처럼 인간 친화적인 맛은…. 승우는 확실히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이 총각. 여기 들어 있는 잼 좀 따로 갖다줘.” “네 뭐 하시게요?” “아, 어른이 달라면 갖다줄 것이지. 동방예의지국에 왔으면 그 법도를 따라. 맥주에 넣어 마시려고 그런다.” 약간 뽀로통해진 지미는 잼을 잔뜩 가져와 맥주에 바로 부어버렸다. 승우는 험험 기침을 하곤, 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맛을 음미했다.
“우하하하 마누라, 가게 문 닫고 이리 좀 와 봐.” 한 시간 후 승우는 에로 잡지와 비디오를 잔뜩 사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이 양반이 미쳤나, 지금이 몇신데?” “내가 말야. 그 맛의 비결을 알아냈단 말이야. 걱정마. 아무렴 미국 놈 것보단 조선 놈 것이 우리 입맛엔 맞을 테니까.” “아니 그 맛이 뭔데?” “이리 좀 와보라니까.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먹어서 혼자서 만들기는 좀 어려우니까, 마누라가 좀 도와줘야 쓰겠어.” 그날 밤 승우는 새로운 맛을 만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고향으로 장기 요양을 떠나게 되었고, 다음날 빵집 문 앞에는 종업원 모집 전단이 붙게 되었다. “생기발랄한 숫총각 급구. 숙식 제공 및 재택 근무도 가능.”
등장인물
승우: 한때 중국집을 운영했으나, 엄청난 맛으로 무장한 집이 ‘신장개업’ 하는 바람에 폐업, 빵집으로 업종 전환.
희경: 승우의 부인. 취미 껌 씹기, 특기 남편 씹기.
지미: <아메리칸 파이>의 잘 나가는 숫총각 주인. 신부감을 찾아 한국에 왔다는 설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