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콕 찌르는 코미디의 제왕 우디 앨런이 <할리우드 엔딩>이라는 신작을 들고왔다. ‘독설가’ 우디 앨런이 할리우드식 결말을 가져와 자기 스타일로 요리했는데 역시 좀 다른 맛이 난다. 할리우드 영화의 엔딩들엔 어떤 특징들이 있지않던가. 가족들은 모여앉고, 남녀는 맺어지고, 영웅은 지구를 구한다. 비극으로 끝나는 할리우드영화는 보러 가고 싶지도 않겠지만, ‘이렇게 끝났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는 건 자유다. 올해 할리우드영화 중 인상깊은, 혹은 어이없는 엔딩을 보여준 영화들도 3개씩 뽑아봤다. 영화의 결말에 관한 기사이니만큼 스포일러가 가득. 알아서들 조심해주세용~.
1.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
할리우드란 곳은 가족 빼면 별 남는 게 없는 동네다. 그거 빼고 영화 만들어보라면 이러지 않을까. “팥 없이 호빵을 어떻게 만들어?? 버럭!” 왜 아니람.
할리우드표 가족영화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대표적인 결말이란 이런 식이다. 1.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있다. 2. 아들과 싸운 뒤로 안 만난 지 한참 됐다. 3. 할아버지는 늘 손녀가 그립다. 4. 물론 때는 크리스마스여야 한다. 5. 이런저런 계기가 생긴다(요때, 영화는 다른 쪽에서 열심히 전개되고 있다). 6. 할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전화 한통을 때린다. 7.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바로 튀어온다. 8. 세 사람, 대략 행복한 표정.
드라마나 코미디뿐이랴. ‘가족신’은 액션, 호러, 재난 어디든 강림한다. <다이 하드>의 맥클레인은 아내 한번 만나려다 빌딩을 초토화하고, <링>은 할리우드로 건너가니 엄마-자식 얘기로 변신하지 않더냐. 과거엔 ‘미국이 세계를 구원하리’로 끝장을 보던 재난영화들도 최근 가족신을 모셨다. 다들 속절없이 죽어가는 아수라장 속에서 굴하지 않고 가족을 찾아다니는 주인공, 결국 (죽지도 않고!!) 가족과 상봉한다. ‘할리우드 가족 영업소’ 앞에는 ‘결말 200% 보장’이라는 현수막이라도 걸어놓은 건지.
가상 시나리오, 이렇게 끝났다면?/ <투모로우>
부득부득 아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잭. 친구 프랭크 왈, “나도 같이 가주겠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격의 눈빛. 하나, 유리가 깨지면서 고층빌딩 내부로 추락한 프랭크, 태도 돌변. “에이씨, 괜히 따라왔네. 혼자는 못 죽어!” 끈을 안 끊어주어 다 같이 추락, 잭도 죽고 만다. “아버지가 오신댔어!”라며 도서관에 있자고 주장했던 샘은 땔감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지자 사람들에게 오지게 얻어맞는다. 흑흑… 슬픈 결말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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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 하드>, <더 링>(헐리웃 리메이크), <투모로우>
2. 달성 이후에는 궁금하지 않은 사랑
사랑은 언제 어디서든 시작된다. 어느 강의실에서, 어느 술자리에서, 어느 영화관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인 것이다. 하지만 깨가 쏟아지는 시간은 잠시, 곧 서로를 지루하게 괴롭히다가 어느 한쪽의 입에서 “우리 그만 헤어져!”가 나오고 나면 그 다음은 자기 위안이다. 전화해놓고 숨만 내쉬다 끊거나,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소개팅 좀 시켜달라고 온갖 사람을 괴롭히고, 집 앞에서 스토커 짓도 해본 뒤, 지치면 체념한다. 다음 사랑까지는 멀고 또 험하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선남선녀들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럼 사랑이 안 변하니?” 따위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사랑영화들은 어느 강의실과 어느 술자리와 어느 영화관에서의 일을 세세하게 보여준 뒤, “라면 먹고 갈래요?”까지 오면 기냥 끝나버리지 않던가. 키스를 나누거나, 결혼식장을 행진하거나, 이도저도 다 필요없이 베드신이거나 말이다. 그 뒤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뒤는 둘 문제니 당신이 무슨 상관이며, 설령 헤어진다 해도 짧은 인생 구차하게 굴 거 뭐 있냐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할리우드의 선남선녀가 슬픈 얼굴로 돌아서는 꼴은 아무도 못 본다. 도둑과 그를 쫓는 형사마저도 결국은 러브러브로 끝나는 게 그 동네 룰인 걸 뭐.
가상 시나리오, 이렇게 끝났다면?/ <웨딩 플래너>
트럭에 치일 뻔한 메리를 스티브가 구해준 데서 싹튼 사랑. 결국 두 사람은 원래 임자와의 결혼을 끝내고 서로 잘해보기로 한다(여기까지가 원래 줄거리). 하지만 이러진 않았을지. 결혼식 준비하다가, 스티브는 자기 결혼식 웨딩 플래너와 또 눈이 맞고, 메리 역시 트럭에 치일 뻔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거다. “저기… 우리 결혼 말이야…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될까?” 자꾸 하다보면 버릇된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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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플래너>
3. I’ll be 백배래백백배~엑!
주인공이 용광로에 떨어졌는데 다음편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하려고만 하면 할리우드는 못하는 일이 없다. <에이리언4>의 경우는 좀 심하긴 하지만, 저만큼 억지가 아니더라도 할리우드 호러나 SF 블록버스터영화의 엔딩은 늘 속편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 혹시 다음편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일단 결말은 모호하게 해놓고 보는 게다.
어기적어기적 다니며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니는 덩치 큰 악어양이 말하길, “저는 다음편에 아마 못 나올 거예요. 워낙 스케줄이 바빠서요. 하지만 어딘가에 알은 까놓았거든요? 그리고 변기에다 새끼 악어 버리는 분들 여전하시더라고요. 어유, 왜 저도 그렇게 자랐잖아요. 호호~.” 유비무환이라 하였으니, 다이너마이트에 산산조각이 난다 한들 무엇이 걱정이랴. 잘린 꼬리를 바위 틈에 꼬불쳐 두거나 먹구름 낀 하늘 아래로 자동차를 몰고 가는 정도의 센스를 발휘해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I’ll be back”에서 “I’m back”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대구는 준비된 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니라.
가상 시나리오, 이렇게 끝났다면?/ <터보레이터>
결말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는 것보다 <터미네이터>만큼이나 훌륭한 패러디 에로 <터보레이터>를 추억해보는 건 어떨지. <터미네이터>에서처럼 벌거벗은 아자씨가 등장, 갑자기 경찰순찰차의 여경관과 엄청난 섹스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 5분이 멀다 하고 화려한 섹스신이 전개된다. 미래에서 온 터보레이터가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성의 노리개로 전락시키자, 미래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또 다른 터보레이터를 파견한다는 것이 줄거리라면 줄거리. “알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온다. 처음으로 희망을 안고 향한다. 터보레이터 같은 기계도 성행위의 가치를 습득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으니까” 같은 명대사들을 남겼지.
4.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은?
미국 같은 ‘나서기’도 없다. 반장 시켜준 적도 없는데 지가 반장인 줄 안다. 그런 과대망상은 영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세뇌를 당한 건지, 세뇌를 시키는 건지, 원). 한 사람이 수십명의 테러리스트로부터 인질을 구하고, 미국만이 지구촌을 구원할 당사자라는 식의 사고는 할리우드에서만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전용 비행기가 납치되자, 심지어 대통령 본인께서 ‘액숑가이’로 변하는 판이니 할 말이 없다.
약간 체면을 차리는 사람들은 한번 정도 돌아가보지만, 별거 없긴 마찬가지. 평범한 시민이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거나, 옛 역사의 영웅 이야기를 할리우드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인데, 어느 쪽이건 뜯어보면 그놈이 그놈이다.
할리우드영화에서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런 식의 장르영화에서만은 예외. 마지막 감동을 쥐어짜기 위해 주인공을 죽이는 것도 불사한다. 영웅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래서 세계는 살아남았다는 거지.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물으메 “머를 마이 멕에이지 머” 하고 대답하는 마음을 저 인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가상 시나리오, 이렇게 끝났다면?/ <아마겟돈>
행성과의 충돌로 지구가 아작나게 될 상황. 굴착 전문가 해리와 그 일당은 특명을 받았삼. 정밀 계산된 행성의 어떤 지점에서 구멍을 파고 폭탄을 터뜨리라는 것인디…. 우여곡절 끝에 작전 성공, 결과가 드러난다. 몇개로 쪼개진 파편이 이라크와 북한에 떨어졌다나? 이후 백악관 공식발표, “쏘리쏘리~ 고의는 아니었삼~ 결과적으로 세계 자유민주주의에 기여했으니 나쁠 거야 있겠삼~?” 역시 할리우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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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5.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래~
한국 반전 설화(?)의 고전은 역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쩌구…’로 시작해서 “내가 아직도 니 엄마로 보이니?”로 끝나는 이야기다. 마음놓고 있다가 얻어맞으면, 긴장하고 있다가 맞았을 때보다 골이 백배는 더 울리는 법. 요즘은, 반전이래서 보러 갔더니 ‘반전이 아닌 게 반전’인 세상이지만, 돌이켜보면 할리우드엔 훌륭하신 사이코 사마들과 다중인격자 오빠들, 죽은 줄도 모르는 귀신님들과 연기 천재들이 계셨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고 굳게 믿는 딸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무죄 판결을 받아왔는데, ‘얘네 아빠 사실은 진짜 나치 맞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정말 ‘웩!’이다. “얘가 애는 착해요. 가끔 다른 인격이 나타나서 살인도 하고 그래서 그렇지잉” 풀어줬더니 애가 이런다. “이게 원래 나야. 으흐흐~.”
절름발이에 바보인 줄 알았더니 완죤 지능범이고, 귀신 보는 애 치료하는 의사가 ‘미안하다, 귀신이다’ 하시면 멀쩡할 사람 없다. 하지만 반전은 언제나 환영, 제대로만 해준다면 흔쾌히 뒤통수를 내드릴 용의가 있다.
가상 시나리오, 이렇게 끝났다면?/ <디 아더스>
“꺄아아아아~!” “뜨아아아아~!” 집에 ‘다른 자들’이 있다며 ‘생쑈’를 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들이 귀신이다. 각성하기 무섭게 날아오는 집주인 말씀, “빨리 방 빼!” “못하거든? 여기 원래 우리 집이거든?” “아아앙~ 왜 하필 이 집이야, 10년 만에 대출받아 샀단 말야!” “그건 당신들 사정이고, 귀신이 갈 데가 어딨어?” 옥신각신하던 사람과 귀신, 체념하고 살게 된다. 종국엔 이혼남과 과부귀신이 새 출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나? 웃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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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센스>, <디 아더스>, <유주얼 서스펙트>
올해 인상깊은 할리우드 엔딩 BEST & WORST 3
BEST 1. <밀리언 달러 베이비>
프랭키의 쓸쓸한 인생에 딸로 자리한 메기. 프랭키는 메기의 부탁대로 그녀의 눈을 감기고 체육관을 떠난다. 메기 생전에 같이 갔던 레몬파이 가게에서 누군가 그의 모습을 보았을까? 가슴이 먹먹해진 관객은 눈물이 보일까 서둘러 일어나거나, 자리에 붙박혀 일어나지 못한다.
BEST 2. <배트맨 비긴즈>
암묵적으로 배트맨의 뒤를 봐주던 고든 형사, 지붕에 박쥐 조명을 켜놓고 사건을 의뢰한다. “이 남자를 잡으시오. 강도사건에 두 건의 살인, 당신처럼 연출을 좋아하고… 명함을 남겼더군.” 누구냐고. 누구긴, 조커지. 이 엔딩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완벽한 프리퀄이 되었다.
BEST 3.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서로 엄청난 무기를 휘두르며 죽이려 들던 부부가 갑자기 “사랑해, 자기야~” 모드로 돌변하는 전개가 어이없지만, 엔딩은 그 황당함을 덮어준다. 시작과 똑같이 부부관계 클리닉에서 상담을 받는 상황이지만 얼마나 화기애애한가. 섹스 질문 좀 다시 해보라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손가락 열개를 쫙 펴보이는 브래드 피트, 완전 귀여우심.
WORST 1. <우주전쟁>
땅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지구를 초토화하는 외계 생명체들. 그렇게 무섭던 외계인들이 갑자기 쥐약이라도 먹은 듯 죽어주니 허탈하거니와, 결국 가족으로 끝장을 보니 통탄할지고. 피난 다니던 사람들은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인데, 레이의 전 아내는 환한 빛을 받으며 선녀처럼 등장하여 실소를 자아냈다.
WORST 2. <베니티 페어>
가진 것 하나없이 영리한 머리와 신분상승욕 하나로 살았던 여자, 베키.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가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는 것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웬걸? 과거에 알았던 (그러나 심지어 사랑하지도 않았던!) 부자 남자가 돌아오자, ‘잘됐다!’ 하며 인도로 가버린다. 도대체 뭐가 세기의 로맨스라는 거야?
WORST 3. <오션스 트웰브>
전편만큼 꽉 짜인 맛은 없었지만, 캐릭터와 재기발랄함이 여전히 즐거웠던 <오션스 트웰브>. 어리버리한 라이너스는 전편에 이어 또! 속는데, 그 회상장면에서 깨끗하게 끝나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도둑과 검사로 쫓기고 쫓던 러스티와 이사벨이 이사벨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마지막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족이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