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린 비글로의 <블루 스틸>을 처음 봤을 때 참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적어도 여성문제에 관한 한 우리보다 100년쯤은 앞선 미국이고, 할리우드영화들은 ‘지 아이 제인’ 같은 여성투사들을 제법 배출해왔으며, 현대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한 <터닝 포인트> 같은 걸작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지만, <블루 스틸>은 새삼 “아, 이래서 남자가 만드는 여성영화와 여자가 만드는 여성영화는 다른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주인공 여성에게 경찰관이라는 권력적 지위를 부여한 것도 그렇고,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 의한 가정 내 폭력과 사이코에 의한 사회적 폭력을 거기에 상응하는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도 그랬다. 가령 <밴디트 퀸>과 <엘리자베스>를 만든 인도 출신 세카르 카푸르 감독 정도면 페미니즘 영화비평의 연구주제가 될 만도 하지만, 정작 나는 두 작품이 모두 불쾌했다. <엘리자베스>는 충동적이고 의존적인 저것이 여제의 퍼스낼리티인가 의구심을 일으켰고, <밴디트 퀸>은 산적두목이 된 여자가 여자라는 ‘인종적 콤플렉스’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결국은 조직을 괴멸시키는 모양이 참으로 딱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페미니즘 시계는 몇시쯤일까.
몇해 전부터 연말마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을 중심으로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행사가 열려왔다. 어찌된 일인지 이 행사가 내년 1월로 밀리면서 허전해진 나는 올해 한국영화들에 대해서 예년처럼 한번 ‘페미니즘 성적표’를 작성해보았다. 관음증의 대상이거나, 희생적이고 의존적인 모성을 부각시키거나, 남성주인공의 캐릭터를 보완하는 인물로서 천사 또는 마녀로 그리고 있거나, 하는 세 가지가 여성을 다루는 가장 전통적이고 상투적인 방식이라고 볼 때, 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를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최고의 영화와 최악의 영화를 각 세편씩 뽑았는데, 최악의 영화를 밝히면 후환이 따를 것 같아 최고의 영화들만 적기로 한다. <마요네즈> <거짓말> <해피엔드>. 개봉시기 때문에 불행히도 <쉬리> 뒤에 묻혀버린 <마요네즈>는 우리 영화사에서 여성 인물들에 관한 더할 나위 없는 사실주의 드라마로 남을 만하다. <거짓말>이나 <해피엔드>는 논란의 여지를 충분히 남기는 텍스트들이다. <거짓말>은 관음증적 시선을 지적할 수도 있겠고, <해피엔드>는 실제로 ‘바람피고 남편을 능멸한’ 여자에 대한 복수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고전적인 성역할이나 통념상의 가족제도를 훌쩍 뛰어넘는 가치전복의 힘을 내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에 훨씬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