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가장 뛰어난 시대극 가운데 하나로 평가 받는 <글래디에이터>. 비록 막시무스의 믿음직한 모습은 없지만, 이 화제작의 메가폰을 잡았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다시 한 번 시대극에 도전한다는 소식은 팬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대 속에 지난 여름 공개되었던 <킹덤 오브 헤븐>이 바로 그것으로. 이번에는 십자군 원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의 이야기를 그렸다.
<반지의 제왕>을 통해 유망주로 떠오른 올랜도 블룸이 주연을 맡았고 리암 니슨, 데이비드 튤리스, 에드워드 노튼, 제레미 아이언스, 존 핀치 등의 베테랑 배우들이 관록 있는 연기로 블룸의 홀로서기를 지원해 주었으며 방대한 스토리를 주인공 중심의 에피소드 나열 식으로 가지치기한 과감한 연출 방식, 전장의 한 가운데 카메라를 놓고 함께 달리며 촬영함으로써 박진감을 극대화한 전투 장면 등 여전히 선이 굵고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고 있다.
충실한 다큐멘터리와 제작과정이 돋보이는 부록
아쉽게도 극장 흥행은 부진했으나, 무려 1,000만달러에 이르는 추가 비용을 투입하여 제작된 DVD는 리들리 스콧 특유의 남성적 터치가 가득한 스펙터클을 충실히 재현한다. 2.35대 1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영상은 발군의 선명함과 독특한 색감을 잘 살리고 있어 만족스럽다. 일부 장면에서 배경이 흐릿하거나 사물의 세부를 선명히 재현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지엽적인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화면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날카로울 정도의 선명함을 선호하는 감상자들에게는 미흡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화질이며, 밝은 장면에서 볼 수 있는 피부나 갑옷의 질감 묘사 등 디테일 표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운드는 전쟁 시대극이라는 특성을 200% 살린 웅장함과 세밀한 대사나 효과음의 전달로 대표되는 디테일함이 함께 돋보인다. 전투 장면에서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이나 포탄 소리, 수많은 병사들이 뒤얽힌 백병전에서의 칼과 창, 방패가 충돌하는 소리, 지축을 진동시키는 말발굽소리 등 스피커의 사방에서 울리는 사운드의 향연은 가히 압권이다.
부록으로는 A&E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섹션의 두 편이 볼 만하다. <A&E 무비 릴>과 <역사 대 할리우드>가 그것으로, 극중에서의 묘사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교 및 검증을 주 내용으로 다루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기초로 한 영화이니만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고증과 영화적 상상 사이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지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관객의 구미에 맞게 선별하여 볼 수 있는 기능이 제공된다 하여 관심을 모았던 메이킹 다큐멘터리는 <인터랙티브 프로덕션 그리드>라는 이름으로 제공된다. ‘그리드(grid)’는 격자, 눈금이라는 의미로, 메뉴도 문자 그대로 격자 형태로 만들어져 각각 감독, 배우, 스탭의 관점에서 영화 제작의 세 단계를 분석한 내용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의 메이킹답게 서로 칭찬해 주기 바쁜 모습도 여전하지만, 또한 대작 영화다운 엄청난 규모와 그에 도전하는 제작진의 노력을 꼼꼼하게 기록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극장에서의 흥행 부진 때문인지, 본편에는 아쉽게도 감독이나 제작진, 배우의 음성해설이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순례자의 가이드>라고 하여 감상에 참고가 되는 역사적 사실들이나 영화와 실제 사건의 차이 등을 설명한 문자해설을 볼 수 있다. 이것과 함께 A&E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역사 학습 효과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고유명사의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몇몇 부분의 번역을 아예 건너뛰는 등, 자막 처리의 미숙한 부분이 거슬린다. 20세기 폭스 코리아는 예전에도 <에일리언 4부작> 박스 세트나 <스타 워즈 3부작> 박스 세트 등 대작 타이틀마다 눈에 띄는 무성의한 자막 처리로 소비자들의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도 그러한 상황이 재연될까 우려된다. 이러한 뒷마무리가 부실한 타이틀 때문에 소비자들의 국내판 DVD에 대한 불신이 누그러지지 않고 있음을 출시사들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