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다시 편안한 남자로, <미스터주부퀴즈왕>의 한석규
2005-10-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폭우가 쏟아지던 한밤중, 스튜디오 2층에는 나란히 붙어 있는 2인용 소파 두개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타였던 배우답게 한석규는 정해진 것처럼 소파 중 하나에 깊숙이 기대었고, 몇개 놓인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끌어다가 그 앞에 앉으려 하자, 첫마디를 건넸다. 쿠션을 톡톡 두들기며 “여기에 앉지 그래요?” 머뭇거리자 다른 소파를 두들기며 “여기가 괜찮겠네”. 인터뷰 내내 한석규는 비슷했다. 편안해져도 될 듯한 질문엔 거리를 대번에 좁히고, 아닌 듯싶으면 정색을 했다. 다행히도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한석규가 “신은경과 공형진 모두 밝은 친구들이고 시나리오도 유쾌하여” 재미있게 찍었다는 <미스터주부퀴즈왕>이었다. “신은경씨하고 나, 참 잘 어울렸죠? 베드신도 경박하지 않고 일상적인 부부처럼 나와서 좋았어요.” 생각해보니 몇년 동안의 공백을 두고 <이중간첩>으로 돌아온 뒤 한석규가 이처럼 마음 놓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 영화는 처음이었다.

한석규가 95년 <닥터 봉> 이후 10년 만에 따뜻한 코미디영화를 택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언제나 결정적인 선택의 키워드로 작동한다는 시나리오의 첫인상,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자신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소망. 그는 <텔미썸딩>을 찍은 이후부터 밝은 영화를 만나고 싶었지만 인연은 계속 비껴갔고, <이중간첩> <주홍글씨>로 파멸하는 남자만을 연기해왔다. <이중간첩>을 찍었을 때 다섯살이었던 그의 큰딸은 아빠가 고문받는 장면을 보다가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는 아이들과 볼 수 있는 영화를 한번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내여서 어머니가 영화보러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겨울여자> <정무문> <18인의 여걸> 같은 것들, 문희 나오는 영화도 많이 봤고. 5학년 때 중앙극장에서 <혹성탈출>을 봤는데, 무슨 얘기인지 다 이해가 되고,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어린 마음을 흔드는 영화를 보는 건 너무 큰 추억이죠. 언젠가 어린이영화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가 출연했던 커피CF처럼, 함께 보내는 시간과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한석규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방법 또한 추억을 주는 것이라 믿고 있다. “일에서 얻는 성공도 중요하지만 애아빠가 되니까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게 가장 큰 성공이 되더라고요.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답은 없지만 아이하고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므로 아이가 아빠를 엄마처럼 여기는 <미스터주부퀴즈왕>은 한석규에게 연기와 실제가 섞인 휴식 같은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스터주부퀴즈왕>에서 한석규는 실직하고 몇년이 지났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척만 하고 있는 전업주부 진만으로 출연했다. 노련한 손길로 양념을 치고 김치를 담그는 진만은 어린 딸 다나를 돌볼 때도 친구나 엄마처럼 다정하고 친근한 인물이다. “내가 생활하는 모습이 많이 있죠. 다나하고 있으면 연기를 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감독도 미혼이어서 오히려 나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서 신은경씨가 출연한 게 반가워요. 아이엄마인 동료가 이 영화를 해주었으면 했거든요.” 언제나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정돈된 모습이었던 한석규가 긴 머리 가발을 쓰고 하이힐로 치한을 내려치는 연기도 불사했던 건 그 나머지 부분을 감싸안는 편안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나절을 인터뷰로 보내고 다소 꺼칠한 얼굴로 나타난 한석규는 지방을 돌며 찍고 있는 신작 <음란서생>의 피로도 얹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영화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의 목소리는 생기를 띠었다. <음란서생>은 입신양명의 야욕도, 주색잡기의 즐거움도 몰랐던 서생이, 음란소설을 쓰면서 행복을 엿보는 사극이다. “이건 젊은이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예요. 그 슬픈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실력이 범상치 않았고, 인생의 쓴맛을 겪어본 시선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이 역은 정말 내가 해야 최고로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직감으로 느껴요. <초록물고기>나 <8월의 크리스마스> <넘버.3>도 그랬고.”

지금 한석규는 모두가 그의 행적을 궁금해하는 스타의 지위에 오래 머물러왔고, 참담한 실패를 겪은 적이 거의 없으며, 두딸과 아들 하나를 낳은 가장이기도 하다. 완성된 폐곡선을 그리는 듯한 그에게도 아직 불가능의 꿈이 남아 있을까. “바깥에서 보는 성공과 실패보다는 내가 내리는 성공과 실패의 판단이 더 중요해요. 죽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생길 때가 있어요. 나는 선수인데, 선수로서의 리듬을 잃어버린다는 거죠. 제대로 리듬을 타면 쾌감도 있고, 정말, 단맛을 느끼지만.” 그는 얼마 전에 <음란서생>의 촬영지인 봉화 시골극장에서 밤늦게 영화를 보았다. 나이 지긋한 시골 관객이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정말 좋은 직업을 가졌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인터뷰는 다시 추억으로 돌아갔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추억을 만드는데, 배우는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잖아요. 영화는 배우의 몸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니까. 재능이 있다면 내 아이들도 손자들도 배우를 했으면 좋겠어요.” “폰다 가문처럼요?” 하고 물었더니, 변함없는 웃음을 비춘다. “내가 웃고 있는 사진 보는 게 나도 지겹다”면서도.

사진 윤형문·의상협찬 송지오 옴므,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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