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모래라는 독특한 소재로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갖고 있는 캐롤라인 리프(Caroline Leaf)의 특별전이 오는 10월4일부터 27일까지 중앙시네마에서 상영된다. (주)라바메이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중앙시네마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캐롤라인 리프의 특별전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표현영역을 탐구해온 게일 토마스(Gayle Thomas)의 상영전도 함께 열려 볼거리를 더한다.
캐롤라인 리프는 1946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사진, 그림, 애니메이션, 라이브 액션 등 전방위에서 다양하게 활동한 애니메이터.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9살 소년의 기억을 그린 그녀의 대표작 <거리>(The Street)가 197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그녀만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이 널리 알려졌다.
캐롤라인 리프의 주요 작업방식은 라이트 박스 위에 유리판을 얹어 그 위에 채색을 하거나(Painted on the glass), 모래나 수채 계열의 물감을 칠한 뒤 손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finger painting). 단순하게 보이는 작업방식인지라,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방법에도 한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하면 실례. 모래나 물감의 두께에 의해 노출되는 라이트 박스의 빛의 양이 변화하고, 또한 라이트 박스의 빛 역시 다양한 색상으로 바꿀 수 있으므로 굉장히 다양한 표현방식이 나타난다. 또한 과슈(불투명 수채물감)나 수채물감 등에 적정량의 글리세린을 섞어 습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프레임마다 이미지들의 농담과 빛의 하모니가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녀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그림의 대부분을 손으로 그려낸다는 것. 모래는 물론 물감으로 칠하는 작업까지 손끝으로 작업하기에 딱딱하고 기계적인 느낌이 배제되어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앞서 말한 빛의 농담과 손가락 위주의 담백한 맛이 어우러져, 마치 동양의 수묵화를 보듯 신비로움과 따스한 느낌을 함께 전한다.
한장의 유리판 위에서 애니메이션에 사용될 모든 이미지들을 제작하게 되므로, 이미 제작된 형태를 변형하거나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Mentamorphosis)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캐롤라인 리프는 앞서 말한 <거리>(Street, 1976)나 그녀의 77년작 <미스터 삼사의 변신>(The Mentamorphosis of Mr. Samsa, 1977)에서도 이런 제작방식의 특징을 멋지게 살리고 있다.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The Mentamorphosis)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이 작품은 차차 변해가는 그레고르의 모습과 그의 심경 변화를 색감과 형태만으로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 디졸브나 커트 대신 메타몰포시스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레고르의 의식과 장면의 흐름을 연계한다.
함께 상영하는 게일 토마스의 애니메이션은 캐롤라인 리프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여준다. 스크래치 기법을 사용하는 그녀의 애니메이션은 판화나 에칭화를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강렬한 선을 주로 사용하며, 따스한 파스텔톤 색상이나 강렬한 모노톤 색상을 입혀 새로운 느낌을 전한다. 미지의 열매(?)인 수박을 발견한 뒤 당황해하는 수피족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수피족 이야기>(A Sufi Tale, 1980)는 그녀의 작품 성향을 잘 나타내는 작품. 페르시아 우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이 작품은 유리 위에 채색을 하고, 바늘이나 페인트솔 끝으로 긁어서 표현하는 스크래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평소 자주 사용하는 파스텔톤의 색상을 배재하고, 모노톤의 컬러를 사용해 작품 전체적으로 강인한 느낌을 준다.
캐롤라인 리프와 게일 토마스. 전혀 다른 비주얼을 추구하는 애니메이터인 듯 보이지만, 둘 다 천재 애니메이터로 불리는 노먼 맥라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부드러움과 강인함, 수묵화의 깊이와 판화의 날카로움. 뿌리(?)는 갖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두 애니메이터의 대조적인 애니메이션 세계를 오는 10월4일부터 중앙시네마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