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허진호의 세 번째 영화 <외출>에 관한 아름다운 글은 김혜리가 썼다(“허진호의 멈추어선 느린 발걸음”, <씨네21> 제518호). 그 문장 가운데 “인수와 서영은 같은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중략) 둘은 극히 서먹하고 불편한 거리에 있는 동시에, 졸지에 서로에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정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인수와 서영은 단순하고 천진하게 성실한, 말하자면 같은 당파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자, 이제 남은 일은 등식의 한쪽 변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라는 선언에 가까운 구절은 이 영화의 울림을 서늘하게 전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 그런 다음 김소영은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서 충분히 따뜻하게 껴안았다(“그들이 외출해야 했던 이유”, <씨네21> 제520호). 그러므로 다행히도 나는 이 영화 전체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일 허진호의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글들을 읽으면 된다. 나는 그 대신 그 글들에 기대어 두 장면에 관한 다소 긴 주석을 쓰려고 한다. 그 두 장면은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장면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영화 전체를 위협한다는 느낌이 있다. 나는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이 영화에서 그 이상한 사랑의 잉여, 그 사랑의 이상함을 만들어내는 얼룩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짧은 설명을 더 할 것이다. <외출>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때 영화는 머뭇거린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 순간을 말하려는 것이다. 김혜리의 표현을 빌리면 ‘희미한’ 그 순간.
그가 혹은 우리가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
(좀 장황하게 설명을 하자면) 두 장면 중 첫 번째 장면은 인수(배용준)가 아내의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듣고 삼척에 있는 병원에 가서 병상에 일종의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아내를 본 다음이다. 그런 다음 그 사고의 곁에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도 중태에 빠져 있는데, 그 남자의 아내 서영(손예진)도 만난 다음이다. 둘은 같은 모텔에 머물게 되고, 하필이면 같은 층이다. 아마도 사고가 난 그 이튿날 혹은 그 다음날 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밤, 서영은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산다. 그 약국에 인수도 약을 사러 온다. 약을 먼저 사고 앞서 가던 서영이 모텔에 들어가려다가 그 문 앞에 서 있다. 인수는 모르는 척하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때 서영이 말한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인수가 멈칫 선다. 서영은 “돌려드릴 것도 있고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인수가 대답한다. “문자 메시지를 봤습니다. 그쪽은요?” 서영이 대답한다. “저도 메시지를 봤어요, 그 사진기, 남편 게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우선 이 장면은 나눠 찍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말한 다음 숏을 나눈다. 물론 그걸 나눌 것인가, 말 것인가는 허진호의 마음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다음 왜 사운드를 그렇게 넣었을까, 라는 것이다. 서영이 말을 하는 장면은 모텔 문 바깥에서이다. 물론 카메라도 바깥에 있다. 그런 다음 숏을 바꿀 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인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자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멈춘다. 멈추자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힌 다음 두 사람은 문 바깥에 머물면서 대사가 이어진다(투숏). 그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앞의 숏과 아무런 톤의 변화없이 진행된다. 더 이상한 것은 문이 닫혀 있는 저편의 빗줄기 소리까지 천연덕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모텔의 문을 사이에 둔 대화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이 듣고 싶은 대사만 듣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다음날 같은 문 앞에 후배 광일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인수가 “밥 먹으러 가자, 자고 갈 거야?”라고 묻자 광일이 “아뇨, 내일 공연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인수는 문을 열고 광일과 함께 나서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대답한다. 그때 카메라는 문 안에 있다. 그 둘은 문이 닫힌 다음 걸어가면서 무언가 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닫힌 문 때문에 더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서영이 한 그 말은 반드시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모텔 안으로 들어와서 방문 앞에서 서영이 인수에게 카메라를 건네는 것이 보이고, 서영의 방 안에 들어가서 서로의 배우자의 휴대폰 문자를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 신은 인수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서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아내 수진과 서영의 남편 경호가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숏이 뒤이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불가능한 목소리의 성립. 그 신의 대사 자체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 앞에서 나눈 숏의 사운드는 문에 의해서 ‘구태여’ 그 대사의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숏은 한신 안에서 객관적, 현실적, 실제적 장면을 보여준 다음, 갑자기 숏을 나누어서 뒤이어지는 대사에 의혹, 기대, 착각, 환청,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통해서 무언가 그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괴하게 만든다. 이 숏은 갑자기 사실상 객관성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무나도 자명해 보이는 이 광경이 불현듯 서영이 이 말을 한다, 로부터 서영에게 이 말을 듣고 싶다, 로 바뀐다. 닫힌 문 저 너머에서 들리는 말, 문을 닫은 다음 귀기울이는 인수의 자리에서 들리는 서영의 대사.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영은 틀림없이 인수를 불러 세웠다. 그런 다음 서영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주관적 착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차라리 그런 대사가 나오기를 기대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그렇게 들리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 그 기대 안에서 상상하는 것, 그것이 기대의 지평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문 바깥에 인수와 서영을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은 다음 서영의 말에 귀기울이는 인수의 그 청각의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놓을 때, 우리가 그것을 듣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밀의 공유, 고통의 공유
나는 이 장면과 마주하는 순간 즉시 그 바로 앞의 장면, 그러니까 모텔 복도에서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던 대목이 떠올랐다. 마치 반복 같은 두 장면. 그때는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다. 인수가 서영을 “잠깐만요”라고 불렀고 (그런 다음 똑같이 숏을 나누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똑같이 180도 수평으로 마주보게 세워놓았다. 이 영화에 투숏은 많지만 두 사람을 수평으로 세워놓은 경우는 거의 없다) 서영이 “무슨 일이시죠?”라고 묻자 “남편 분이 출장 중이었던 것 맞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서영이 “네, 맞습니다”라고 하자 “제 아낸 휴가 중이었습니다. 저는 부업 때문에 같이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그쪽도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한다. 이 말은 거짓말의 제안이다. 인수는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요구가 아니라 제안이 맞다. 그 제안에 대해서 서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 복도에서 인수는 거짓말을 제안하고,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서영은 인수에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사진기를 돌려주어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만일 진실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실재의 지식을 (그 둘 사이에서만) 결국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은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행동이다. 복도에서 인수가 거짓말을 제안했을 때 서영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약속을 통해서 비밀을 함께 감추는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사진기를 건네주겠다고 제안할 때, (마찬가지로 서영이 인수에게 그것을 건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감정적 고통의 대상과 함께 마주하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데 복도에서 그들이 사진기를 건네주고 건네받을 때 그들은 배신을 당한, 그동안 속은, 알지 못했던 배우자의 불륜에 관한 실재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알았다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있다. 혹은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의 불륜 상대가 그들의 부부 생활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침입했다는 뜻이며,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부부 생활이 세 사람이 함께 살아왔다는 그 잉여의 부분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인수와 서영은 서로의 상대방에게 고통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위로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을 공유한 다음 고통을 전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안에서 그 문제의 각자의 답을 찾는 대신 (왜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은 저 남자, 저 여자에게서 나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찾았는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들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불륜의 선택, 그 음란함과 부끄러움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수와 서영의 불륜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수진과 경호의 불륜은 인수와 서영의 알리바이이다. 인수와 서영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자유롭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들이 각자 서로의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다음 인수와 서영이 만들어내는 불륜이 자신의 배우자인 수진과 경호의 불륜보다 더 음란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인수와 서영은 사실상 수진과 경호의 불륜의 형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내용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그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한 것일까? 그러하면 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두 사람은 수진과 경호를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갑자기 이 숏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고통 속에 숨어 있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음란함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은 그 목소리의 잉여,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의 이면에 지금부터 시작될 불륜의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그렇다. 드러난 것으로부터 숨겨진 것으로의 후퇴, 객관적 현실로부터 주관적 상황으로의 이행에 끼어든 그 어떤 중재, 무언가 숨기고 싶은 베일의 (외설스러운) 요구. 이미 닫혀버렸지만 투명한 유리문. 아무리 달리 말해도 이 영화는 불륜에 관한 영화이다. 불륜에 대한 불륜이란 없다. 그 실재의 지식을 마주하기 위해서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할 때, 그것을 건네주기 위해 서영이 인수를 불러 세운 다음, 그 대사를 할 때, 그 숏은 불가능한 장면이 된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숏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숏은 어딘가 비밀스럽고, 그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모호한 주관성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실재의 지식은 그들만의 것이 된다.
그러고 나면 이 영화는 갑자기 그 자신의 은밀한 구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순간. 인수와 서영이 술을 마시다가 서영이 인수에게 물어본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세요?” 인수가 대답한다. “음, 잠잘 때.” 그러자 서영도 자문자답한다. “저두요.” 두 사람은 지금 병원에 불륜에 빠졌다가 사고를 당한 자신의 아내, 혹은 남편을 곁에 두고 온 그 남편과 아내로 만나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외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잠을 잘 때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 대답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어느 쪽이건 사실상 그것은 같은 내용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약간의 우회. 부부는 잠을 잘 때만 그 혼자가 된다. 어디서? 꿈속에서, 혹은 밤의 무의식 안에서. 잠자리에서 그 두 사람은 배우자를 곁에 두고 거기서 도망쳐나올 때 행복해진다. 그것도 ‘제일’ 행복해진다. 진실이라면 그 두 사람은 밤마다 아내에게서, 혹은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중이며, 거짓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슬픔이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짧은 사랑, 혹은 (이루어진 불륜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이 아니라 매우 음란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출>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도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인수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지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주관적 사운드와 프레임의 은밀한 메시지. 인수가 서영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대신 그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서 그 마음 안에서 자기를 유혹해달라고 은밀하게 욕망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면서 유혹하는 행위, 혹은 요구하지 않는 욕망.
이를테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의 첫숏. 인수는 눈 내린 주차장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다. 서영은 텔레비전을 끄고 난 다음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창문을 내다본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서영은 처음 웃는다. 그때 이 장면은 투숏으로 찍혔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한 까닭은 서영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보는 것은 유리창에 비친 서영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화면에서 인수가 창문 아래 ‘함께’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찍혔다. 누가 누구를 보는가? 다시 한번 김혜리의 문장을 빌리면 이 사랑은 ‘희미하게’ 시작된다. 지적할 만한 점. 내려다보기 전 서영이 방 안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다가 끌 때 우리는 (성인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두 남녀의 음란한 신음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배우자를 매개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신에서 서영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으로부터 섹스소리를 듣는 것은 내게 사실상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에게는 그들 자신의 만남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도 그래봐야 결국에는 고스란히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그 배우자들의 역겨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예고편처럼 절망적으로 들렸다(그 수많은 채널 중에서 허진호는 그 순간 그 채널을 선택했다). 그때 인수는 차 안에서 “슬픔은 모두 버려, 인생은 아름다워, 슬픔은 모두 버려”라고 있는 힘을 다해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른다. 인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큰소리로 말한 적이 없다. 이 장면을 정확하게 복기하면 인수가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 다음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끄는 서영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눈을 던지고, 그걸 서영이 내려다본다. 그러니까 이 신은 인수가 모두 버리라고 호소한 다음, 마치 거기에 호응하듯이 서영이 반응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 그 호소와 대답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앞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모호한 나눠찍기의 진실
그 다음 (첫 번째 장면에 연관지어서) 두 번째 장면. <외출>에서 내 생각에 인수와 서영이 횟집에 앉아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에서 허진호는 필요 이상으로 장면을 나눈다. 허진호가 그의 두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180숏 내외로 찍었고, <외출>이 321숏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신의 숏 나누기는 더 눈길을 끈다. 이 술집 대목은 단 하나의 신을 29숏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영화는 말 그대로 그들의 표정, 얼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처음에는 팬을 한 다음) 숏을 나눈다. 나는 허진호의 바람대로 대사에 집중했다. 그때 서영이 인수에게 묻는다. “깨어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복수하려구요.” 그러자 서영이 말한다. “우리 사귈래요?” 그 말을 듣고 인수가 서영을 본다. 그때 서영이 대답한다. “둘이 기절하게.” 만일 이 대화가 두 사람의 진심을 말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 사람의 비극, 혹은 <외출>이 지닌 비극성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이 두개의 대사를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래서 여기서 그들은 자기의 주관적 선택의 자리에 상대방을 가져다놓고 서로 다른 내용의 동일한 형식으로서의 불륜을 행동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인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서영과 사귄 것이고, 서영은 인수와 사귀고 싶었던 것으로도 그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같은 것이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의도는 정반대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수가 복수를 할 때 그의 목표는 서영이 아니라 지금 병석에 누운 아내 수진이다. 그러나 사귀려는 서영의 의도는 사랑의 대상을 남편 경호에서 (남편 경호를 사랑한 수진의 남편) 인수로 옮겨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호한 나눠찍기의 순간이 두번 있다. 한번은 서영이 “일단 깨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때이고, 다음 한번은 서영이 “우리 사귈래요?”라고 말한 다음 “둘이 기절하게”라는 덧붙일 때이다. 그때 대사를 따라가면서 나누던 숏이 갑자기 카메라는 인수쪽을 바라보고 있고 서영은 프레임 바깥에서 말한다. 그때 인수가 그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그 말을 하는 서영의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표정이? 왜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그 대답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다. 이 나눠찍기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정확하게 인수의 태도와 그의 아내 수진의 운명으로 반복된다. 인수의 아내 수진이 깨어난 다음 병실에 누워서 곁에 앉아 참외를 깎고 있는 인수에게 묻는다. “인수씨, 나에게 궁금한 거 없어? 언제까지 안 물어볼 거야?” 인수는 그냥 담담하게 대답한다. “처음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수진아, 그 사람 죽었어.” 그런 다음 인수는 병실에서 나온다. 좀더 정확하게 거기서 숏을 나누었다. 그 말에 대한 수진의 상대 숏은 없고, 카메라는 병실 문 바깥으로 나온 인수를 보여준다. 그때 인수는 수진의 표정을 보지 않는다. 혹은 인수는 수진의 표정에 관심이 없다. 그냥 병실 바깥에서 수진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 울음은 인수가 서영에게 말한 복수에 대한 수진의 응답이다. 그것을 복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숏 이후 수진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수진에게 인수가 한 마지막 대사는 “그 사람 죽었어”라는 말이다. 인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잔인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숏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인수와 서영의 셈치르기
그런 다음 나는 문득 인수와 서영의 마지막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서영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참을 더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서영은 남편 경호가 죽은 다음에도 한참을 더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입을 봉한 것처럼, 말을 잊은 것처럼, 아니 차라리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만일 좀더 기억을 환기한다면 서영이 영화에서 한 첫 번째 대사는 인수에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인수와 나눈 한마디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화장면은 좀 이상하지만 의미심장하다(게다가 카메라는 그때 멀리 떨어져 있다). 서영이 인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침대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이다(마지막 장면, 눈 내리는 자동차 안에서 들리는 건 서영의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뿐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게 서로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 그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서영과 인수의 만남의 장부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질문이다. 매우 치사한 셈이긴 하지만 계산을 해야 한다면 인수는 이 외출의 대차대조표에서 유일하게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아내 수진에게 복수를 했고, 그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는 죽었고, 그는 그 남자의 아내 서영과 섹스를 했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지 않다. 서영은 반문한다.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 인수의 계산은 어디서 틀린 것일까? 서영이 인수의 계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말은 무시무시하게 집행된다.
영화는 갑자기 이 대사가 나온 다음,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서영이 인수와 호텔 방에 있는 동안 그의 남편은 15시23분에 죽는다. 서영은 호텔에서 인수와 함께 있으면서 간병인 아줌마에게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갈게요, 부탁 좀 드릴게요”라고 말했지만 아침에 가지 않았다. 서영은 전화를 받고서 오후 늦게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병원에 도착한다. 인수가 서영을 다시 만나는 것은 장례식장에서이다. 인수는 분향을 한 다음 서영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한다. 이때 다시 한번 서영과 인수를 수평 투숏으로 찍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서영과 인수 사이에 서영의 죽은 남편 경호의 영정 사진을 세워놓았다. 그래서 인수가 고개를 숙여 서영에게 인사할 때 인수는 정확하게 그녀의 남편 경호의 사진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인수는 그걸 알지 못한다. 물론 서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 인수는 서영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지만, 서영은 인수와 그의 남편 경호에게 인사하는 것이다. 서영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서영은 자기의 외출이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반대의 방식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귈래요?”라는 말이 남편의 자리에 (남편과 사귄 여자의 남편) 인수를 가져다놓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자리는 폐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인수는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이 거기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장소를 찾은 것이다.
불길한 엔딩의 예감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에필로그가 더해져 있다. (‘아마도’ 아내와 헤어지고) 이사 간 인수의 아파트 방이 보이고, 인수는 짐더미 속에서 자장면을 먹는다. 그런 다음 야외무대 공연장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인수와 그 곁에 앉은 후배 광일이 보인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다음 봄날의 늦은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누구라도 여기서 인수와 서영이 삼척의 해변을 걸으면서 한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인수의 질문, “어떤 계절 좋아해요?” “봄이요, 인수씨는요?” “전 겨울을 좋아해요” “저두 눈은 좋아해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봄에 눈이 내려야겠네요.” 봄에 눈이 내리는 것은 서영의 소망이 아니라 인수의 욕망이다. 그리고 정말 봄에 눈이 내린다. 그 다음 장면에서 눈 내리는 차창 바깥이 보이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춘분을 훨씬 넘긴 절기가 무색하게 함박눈이 쉴새없이 쏟아집니다”라는 뉴스 소리에 뒤이어 두 사람, 서영이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라고 묻자 인수가 “어디로 갈까요?”라는 대답을 두 사람이 다시 만난 해피엔딩으로 보는 것은 가장 진부한 설명일 것이다. 나는 반대로 이것이 불길한 엔딩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공연이 끝난 무대 위로 눈이 내리자 인수는 그 눈을 본다. 그런 다음 숏은 창문 바깥에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이다. 그런데 그 숏은 서영을 찍은 것이 아니라 서영의 얼굴이 비치는 유리 창문을 찍었다. 그 장면은 눈 그친 그날 밤, 삼척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던 인수를 바라보던 그 유리 창문에 비친 서영의 반복이다. 그때 나에게 서영은 이상할 정도로 인수의 환상처럼 보였다. 아니, 차라리 욕망의 대상처럼 보였다. 인수는 봄날에 눈이 내리자 즉각적으로 서영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계절에 관한 그 대화를 나눈 그 해변가 장면, 바로 직전의 신은 두 사람의 섹스장면이었다. 그러므로 이 눈이 인수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서영과의 섹스이다. 그러나 섹스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회하여) 계절이 떠오른 것은 인수의 부끄러움이다.
비 오는 날 밤, 모텔 앞에서의 문으로 전이된 부끄러움의 알레고리. 그런 다음 숏은 조명기 앞에 떨어지는 눈이고,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인수가 서영에게 한 전화라고? 그렇게 생각하기엔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하나는 창문 앞에서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 다음 다시 눈을 보는 인수의 숏이 있다. 여기서 전화를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면 된다. 혹은 전화를 꺼내들면 된다. 그런데 그냥 눈을 보는 인수를 찍었다. 그런 다음 조명기의 숏. 전화벨 소리는 조명기에 덧붙여졌다. 말하자면 여기서도 구태여 숏을 나누었고, 전화벨 소리는 인수가 아니라 조명기를 따라간다. 그 다음. 나는 그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검은 페이드 화면 위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그것은 불길함의 기호이다. 혹은 욕망의 소리이다. 모든 전화벨 소리는 사실 욕망의 호소이다. 누구의 전화일까? 누구이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 전화를 받으면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것이 누구의 전화인지, 무슨 말일지 알기 전의 나를 부르는 호명에 대한 대답 직전. 이미 예정된 결과에 대한 질문, 혹은 나를 부르는 당신 안의 나. 그런데 핵심적인 질문은 그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수인가, 서영인가? 허진호는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기 전에, 여기에 목소리가 개입하기 전에 눈 내리는 화단에 피어난 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대답의 무한정한 지연이다. 그런 다음 달리는 차 안에서 눈 내리는 차창을 보여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핵심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때 서영이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인수가 대답한다. “어디로 갈까요?” 물론 이것은 대답이 아니다. 차라리 반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저 뜬금없는 장면, 삼척 교외버스 터미널에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서영에게 낯선 군인이 다가와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량한 질문이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가 있다. 그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막차는 떠났고, 그런 다음 그 한 사람은 (카페에 앉아 몰래) 쳐다보고 다른 사람은 그 순간 자기 곁에 없는 상대를 위해서 서럽게 (이 영화에서 단 한번) 운다. 그런 다음 다시 반복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무엇보다도 불길하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무표정한 목소리만이 거기 남아 있을 때, 내가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할 때, 나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정말 그들이 함께 떠나는 것이라면 그들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추억에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결혼을 한다면, 그들이 이제까지의 과정을 배우자의 자리에서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보장이 있는가? 그래서 인수와 서영이 또다시 그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믿음이 가능한가? 그것은 추억을 배신하는 것이며, 비로소 그들이 실재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윤리적 선택을 포기했고, 그래서 그들은 도덕적 주체로 행동하는 대신 정념적 주체의 자리에서 그 자신들을 정당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섹스가 끝난 다음 바다를 보면서 서영이 “우리 미쳤나봐요”라고 한 말에 인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수는 “우리가 나중에, 아니면 아주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요?”라고 묻는다. 서영은 대답 대신 반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덜 나쁜 선택은 하나뿐이다. 미루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자유이다.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정확하게 그 지점에 있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그 자유를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대신 나는 인수와 서영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의 진정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혹시 당신들에게 그 선택이라는 내기의 기회 자체가 기만은 아닙니까? 당신들이 사랑 뒤에 숨으려는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것입니까? 욕망을 위해서, 아니면 환상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