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황금심장에는 황금팔을, <너는 내 운명>
2005-10-05
글 : 심영섭 (평론가)
인간미와 진중함 빛나지만 투박한 연출이 아쉬운 <너는 내 운명>

낮에는 티켓 끊고 밤에는 단란주점을 뛰는 여자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삼류 가수가 그랬듯이 술집 구석에 앉아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른다. 금수 같은 뜨내기 손님이 휘두른 맥주병에 얻어맞아 피멍든 얼굴을 하고서도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해달라며 눈물을 글썽인다. 유행가 가사처럼. <너는 내 운명>은 적극적으로 심수봉의 노래, 월드컵, 한국영화 같은 자국의 문화 코드를 껴안으며 여성잡지 하단 셋쨋줄에 실릴 법한 이야기를 가지고 사랑에 대해, 순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줄거리인즉 농촌 총각인 석중은 첫눈에 반한 다방 레지인 은하를 죽도록 쫓아다니며 순정을 다 바쳐 그녀를 사랑했다는 거다.

모처럼 둘이 트럭을 타고 야외 극장 깐느에 가서 영화구경을 하던 밤, 영화는 당대의 감성 멜로인 <봄날은 간다>를 영화 속 영화로 차용하면서 방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어쩌면 <봄날은 간다>가 잊혀지지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면 <너는 내 운명>은 죽지 않는 사랑 이야기일지 모른다. 신파 멜로 장르에는 ‘잊는다’는 단어가 아예 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신파 멜로는 늘 나를 울린다. <너는 내 운명>의 인어왕자는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고 어렵게어렵게 사랑을 얻는데 이 역시 슬프지 않을쏘냐. 이 복잡한 대한민국 멜로 장르의 계보학 속에서 신파 멜로, 호스티스 멜로, 작가주의 멜로의 자장을 왔다갔다하며, 도회적인 감성 멜로와 확연한 선을 그으며,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에 인어왕자 이야기뿐 아니라 묵직한 사회적 시선을 싣는다. 사실 우리의 은하는 우아하거나 비극적이거나 개인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한국 멜로영화 역사상 최악의 불치병, AIDS라는 진단을 받는다.

투박한 연출을 상쇄하는 진중함

‘순정도 지나치면 멍청한 거지.’ 차 배달을 나가지 말라며 애원하는 석중에게 은하는 매몰차게 대꾸한다. 한국의 멜로물, 그중에서도 신파 멜로는 순정에 의한, 순정을 위한, 순정에 관한 장르이다(그러니 은하가 근무하는 다방이 순정다방일 수밖에). 1975년 개봉된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당대의 호스티스 멜로물들은 당시 급격한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로 주변부로 계급적 추락을 거듭하는 여성들의 신산스런 인생유전에서 톡톡히 눈물을 뽑아냈다. 이후 호스티스 멜로 장르 안에서 인생에 대해 또 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감독은 박진표 감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3년에 개봉한 정진우 감독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는 흑산도 창녀인 은주와 그를 사랑했던 총각 두진의 순애보를 흑산도 올로케이션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1997년 개봉된 <노는 계집-창>도 따지고 들면 이 계열의 계보 안에서 임권택 감독만의 독특한 인장을 남겼다. 이들 남자 주인공은 한결같이 <너는 내 운명>의 석중처럼 순박하고 우직하고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믿는, 부박한 여자 주인공들에게 ‘고향’이 되어주는 남자들이다. ‘고향=구원자=죽어서도 헌신하는 남자’의 기호는 이들 한국형 신파 멜로에서 또렷한 교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너는 내 운명>은 70, 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가 멜로의 외향과 함께 은근히 겨냥하고 있었던 ‘벗는다’는 문제, 즉 에로티시즘에 대한 강박, 여주인공의 육체에 더이상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농촌에 불어닥치는 국제결혼 문제나 에이즈와 연관된 인권과 언론의 냉대, 혹은 석중과 석중의 어머니 위에 차갑게 군림하는 형으로 대표되는 가부장 문화 같은 사회적 디테일들을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삶의 조건으로 가감없이 짚는다. 다큐멘터리 PD 출신답게 우리 사회 곳곳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들인 박진표 감독의 노력이 전도연과 황정민의 눈물 연기와 버무려졌다고 할까. 그러나 여기에는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창>에서처럼 고만고만한 이야기가 주욱 줄을 섰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모든 평론가들을 제압해버리는 영화적인 ‘한방’이 없다. 예를 들면 <노는 계집…>에서 임권택 감독은 긴 수평 트래킹으로 주인공 영은뿐만 아니라 벌집 같은 유곽의 벽을 길게 롱테이크로 따라간다. 한마디로 주인공인 영은만이 슬프디 슬픈 사연을 지닌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 임 감독은 유곽 전체의 여성들을 삶을 위무해주며, 이윽고 한 여자의 삶이 전체 유곽의 삶 속으로 서서히 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노는 계집…>은 보는 이를 제압하는 구석이 있다. 이 ‘한방’이 <너는 내 운명>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임권택 감독은 99편이 되는 영화를 만들었고, 박진표 감독은 이제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 안에는 장르가 무엇이고 주인공이 누구이든 간에 아직까지는 ‘사회’와 ‘죽음’의 문제가 녹아 있다. 권투에 비유하자면 그는 무엇을 만들든 라이트 헤비급에서 헤비급을 오갈 것이다. 데뷔작인 <죽어도 좋아>에서 7분간의 롱테이크로 찍힌 노부부의 정사장면은 프랑스 현지 언론에 의하면 ‘감각의 제국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평가를 얻었는데, 죽음의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리턴할 수 있는 살아 있다는 존재론적 확인이 노인의 성이라는 사각지대에까지 햇살이 들게 만들었다. 박진표 감독은 고정된 카메라로 이 장면에서 ‘훔쳐보기’ 대신 ‘지켜보기’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의 이런 태도,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이들의 부박한 삶을 들추어낼 때 그가 취하는 어떤 윤리적인 태도와 신중함은 <너는 내 운명>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만의 특징이다. 박진표 감독은 신파 멜로인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히려 고정된 카메라로 등장인물들과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면 석중이 은하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돈을 건네고, 은하가 석중이 쥐어준 돈을 뿌릴 때, 감독은 나선형의 계단에서 부감으로 신파적 감정으로 충만한 이 장면을 그냥 지켜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진표 감독의 그런 인간미와 진중함이 투박한 연출력을 상쇄하는 어떤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담는 그릇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진표 감독이 만드는 것은 영화이지 다큐멘터리는 아닌 것이다. 두 시간의 장편을 끌고 가는 측면에서 박진표 감독은 가끔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서 실수를 한다. 예를 들면 은하가 석중의 귀에 뽀뽀를 하고 이어 석중이 귀를 만지는 장면은 귀여운 방식으로 매치 컷이 되어 있지만, 은하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석중의 앞을 지나는 신이나 일련의 오토바이 장면에서는 연속 편집의 기본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다. 또한 감정의 충만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여백장면이나 속도 감각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감히 말하자면 일단 습관적으로 배우의 행동이나 대사를 따라 커팅을 하는 몸에 밴 연출 버릇부터 놓아야 한다고 감독에게 주문하고 싶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석중에게 진짜 몸을 주던 날, 은하는 침대에서 회한이 잠긴 얼굴로 고즈넉이 누워 있다. 이 장면에서 전도연의 얼굴 연기는 정말 일품이다. 대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나이테를 안으로 숨겼기에 저런 표정이 가능한 것일까.

감독은 전도연의 클로즈업 이후 다시 황정민의 시점 숏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들어가는 황정민의 동선으로 컷을 짠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의 클로즈업은 전도연이란 배우의 연기력이 출중한 이상, 석중의 시점 숏을 굳이 넣지 않아도 더 길게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바닷가에서 떠난 은하의 이름을 부르며 파도가 넘실거리는 제방에서 석중의 뒷모습을 잡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황정민을 잡은 롱숏과 그의 얼굴 클로즈업을 함께 붙이는데, 사이즈의 매치가 전혀 맞지 않는 편집으로 인해 감정의 선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가 감독이 열심히 찍은 컷과 그렇지 않은 컷간의 차이가 너무 심해 전반적인 영화의 톤이 많이 튄다는 것이다. 과수원에서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나 잡아봐라를 하는 두 사람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목욕하는 알콩달콩한 신혼장면 경우, 배경은 유독 화사하고 미술과 촬영 모두에서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한때를 묘사한 이들 장면은 사실 다른 장면들과 통합적으로 작용하기보다 여타 트렌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상투성을 영화에 부여할 뿐이다. 특히 은하를 가둔 감옥에 꽃잎이 흩날리는 판타지 장면 역시, <오아시스>의 연출을 떠오르게 할 만큼 이 장면만이 따로 논다. 결론적으로 외람되지만 한말씀 드리자면, 이야기를 요약하고, 좋은 소재와 연기를 삶 속에서 이끌어내는 것 외에 박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어떤 형식을 갖출 것인가, 자신이 찍은 이 한컷이 다음 컷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심각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것이다.

더 많은 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자, 그러니 나는 무엇을 빌어야 할까. 어느 마을에 두명의 의사가 있었는데 한명의 의사는 솜씨는 좋지만 환자에게 많은 돈을 받는 마음씨가 나쁜 의사였고, 또 한명의 의사는 솜씨는 부족하지만 무료로 환자들을 고쳐주는 마음씨가 착한 의사였다. 나는 하느님에게 무엇을 빌어야 할까. 아마도 착한 의사에게 솜씨를 좀더 내려달라고 기도해야겠지. <너는 내 운명>을 보며 바로 그것을 빌었다. 이 의사에게 솜씨를 더 내려주십시오. 그는 황금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니. <너는 내 운명>은 박진표 감독이 방송에서 영화로 옮겨가는 과도기 위에 놓여 있는 영화이다. 영화라는 최종 종착역에 도착하기 위해 속히 그가 더 많은 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신파 멜로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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