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Duelist>를 보고 난 뒤, 생각했다. 이건 스타일의 과잉일까, 이야기의 실패일까. 혹은 스타일의 과잉에 이야기의 실패는 필연적일까. 예전 같았으면, 이건 감독 자의식의 과잉이 창출해낸 스타일의 빈 껍데기야, 라고 단정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명세라는 스타일리스트에 덧붙여진 아우라 때문이 아니라(사실, 난 이명세의 이전 영화들을 사랑한 기억이 없다) <형사…> 초반, 김보연과 관련된 장면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된 시장의 난장판 장면들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난장판 속에서 나는 ‘영화’를 보았다. 강동원과 하지원과 안성기 각각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움직임, 그들의 멈춤, 그들의 이미지 속에서 폭발할 듯, 폭발할 듯,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혼란한 어떤 순간과 어떤 에너지를 체험했다. 물론, 영화의 문이 열릴수록, 이 감동은 점점 죽어갔다. 마치, 한순간 찬란히 핀 꽃에서 죽음의 암시를 읽어내듯, 나는 영화 초반 ‘이미’ 이루어진 찬란함 속에서 영화의 내리막길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영화 <형사…>의 운명을 슬퍼하는 글이다. 실패를 예견하고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그 운명.
카니발의 끝, 죽음의 운명
그 운명을 생각하면서 분명해지는 건, <형사…>를 스타일의 승리 혹은 이야기의 몰락이라는 이분화된 논리로 분석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면서 비주얼의 화려함과 이야기의 빈약함, 그리고 그 둘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허무함을 불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스타일과 이야기의 불균형으로 이 영화의 운명을 분석해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나는 이러한 논리, 즉, 스타일은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전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영화 초반, 나의 감동과 그 감동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강동원과 하지원과 안성기와 시장 사람들과 도적들이 얽히고 설키며 이뤄낸 그 초반의 감동은 영화 전반의 이야기 구조와는 완벽히 분리된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느낀 흥분은 영화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인물들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을 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상은 단순히 그 순간의 현란한 스타일에 대한 매혹이라고 해버리면 될까? 그건 아니었다. 스타일만으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그런데 왜 오직, 그 순간이었을까. 나는 그 순간을 분석하기 위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스타일과 이야기의 불균형 혹은 이야기와 스타일 각각에 대한 논의 대신, 이 영화가 그 둘의 관계에 의존하며 스스로의 미학을 완성시키려 하는 방식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속에서 이 영화의 가장 빛나던 순간과 그 순간의 영원한 사그라짐에 대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만약, 이러한 구분이 거칠고 단순해 보일지언정 허락된다면, 영화를 크게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스타일에 중심을 둔 영화, 이야기에 중심을 둔 영화, 그리고 스타일과 이야기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은 영화. 평론가 김지미는 <형사…>에 대한 분석 말미에서(<씨네21> 520호 영화읽기, ‘소년소녀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이명세의 영화에 “서사와 영상간의 팽팽한 긴장의 끈”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위의 세 종류 중, 세 번째 경우를 지칭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와 스타일의 균형이 다른 누군가, 예컨대, 봉준호나 박찬욱에게는 어울리지만, 이명세에게는 애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명세에게 ‘이야기와 스타일의 균형’은 너무 안전한 길이다. 전작들을 보아도 그는 이 안전한 길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명세는 <형사…>에 관한 인터뷰에서도 누누이, “드라마를 하려면 뭐 하러 영화를 하는가”라며 영화의 스타일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야기를 아예 내팽개쳐버린 것일까? 나는 솔직히, 그가 감히 이야기를 버렸다면, 이야기의 흐름과 상관없는 스타일의 흐름을 창조해냈다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훨씬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들을 창조해내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 닳을 때로 닳아버린, 후지고 촌스러운 이야기의 구조를 빌려온다. 이 뻔한 이야기 구조 위에 아름다운 영상을 덧입혀, 그 둘의 현격한 수준차를 통해 자신이 마침내 도달한 스타일의 경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안 봐도 뻔한 전형적 이야기를 택했던 것일까. 하나, 그 시도는 조금 비겁해 보인다. 그 시도는 오히려, 이야기를 의식하는 스타일, 이야기를 전제한 스타일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이야기의 전형성이 새로운 스타일을 돋보이게 하기보다 그 스타일을 함몰시키고 있다는 걸, 이야기와 스타일 사이의 이분화된 시선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말 것이라는 걸 그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못내 아쉬운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이 영화 초반의 잔영에 그토록 매혹되는 이유는 그 순간만큼은 스타일과 분리된 이야기의 그림자가 아직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때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시간과 공간의 흘러넘침, 모든 경계의 지진을 경험했다. 하지원과 강동원과 안성기와 수많은 인물들이 순간의 부딪침, 충돌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 누구의 존재도 고정된 틀 속에서 읽히지 않았다. 마치 하지원은 어느 순간, 안성기 같았고, 강동원 같았다. 내 이해력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무엇을 향해 뛰는지, 무엇을 쫓는지, 영화의 방향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시장판의 그 빠른 뒤섞임과 대조되는 느린 화면 속에서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몸의 미세한 변화, 움직임이 살아났다.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슬픈눈의 떨리는 긴 옷자락과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하지원의 긴 다리, 동선 가득한 동작, 그리고 자글거리는 안성기의 깊은 주름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뒤섞이고 서로 다른 시공간으로 날아갔다. 시끄러움과 완벽한 침묵, 소란한 움직임과 정지 사이. 모든 것이 폭삭 무너진 찰나 살아나는 싱싱한 움직임은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압도했다. 그 스타일, 움직임은 그 자체로 풍성한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그들의 정체성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날, 그 시간 시장통의 카니발.
이야기와 스타일 사이의 진부한 갈등
그러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카니발은 죽음 직전의 충만함처럼, 이 영화의 모든 것이었다. ‘시작은 혼란했으나, 끝은 정리될지어다.’ 영화는 혼란함의 끝에서 낡은 이야기 구조를 꺼낸다. 설마 했지만, 이명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도 놀라울 것 없는 고정된 이야기 틀 속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는 이야기와 스타일의 충돌을 피해, 이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재미없는 이야기 위에서 매우 안전하게, 스타일의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마치 죽은 이야기를 펄펄 끓는 스타일로 보충하려는 듯, 여전히 이야기에 스타일을 끼워맞추려는 듯. 그의 이러한 시도에 의해 영화의 혼란은 정리되어가고, 그들의 과거는 공식처럼 드러나고, 그 과거에 의해 그들 현재의 행동에 필연성 혹은 정당성은 부과되고 마침내, 스타일은 처음의 세밀함과 힘찬 활력을 잃어간다. 그 혼란했던 스타일은 하지원의 몸짓, 강동원의 몸짓, 착한 놈의 움직임, 나쁜 놈의 움직임 등으로 나열되고 구별된다. 그 몸짓에 각각의 근거가 붙고, 각각의 감정이 붙어 마침내 영상과 이야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연결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순간, 그의 스타일은, 누군가의 지적처럼, 화려한, 그러나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활동사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명세가 하지원과 강동원이 별다른 과정없이 어떻게 갑자기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어떻게 갑자기 강동원이 자신의 목숨을 병조판서에게 바칠 수 있는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슬픈눈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일일이 밝히지 않았음을 탓할 필요는 없다. 이명세는 스타일리스트다. 그가 강동원과 하지원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구구절절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생략되고 상징화된 사랑의 몸짓, 예컨대, 둘의 대결장면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의문이 왜 도대체 그는 탄탄한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지 않는가로 향할 것이 아니라, 왜 그의 스타일이 둘의 사랑에, 혹은 인물들의 관계에 설득력 있는 무게감을 주지 못하는가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란한 스타일의 수사가 이야기의 전형성에 발목 잡혀 나약해지는 순간을 깨닫지 못했다. 그가 전형적인 이야기를 선택하여 스타일의 극단을 실험하려고 결정했을 때, 그는 이야기를 죽이고 스타일만 강조할 일이 아니라, 그 낡은 이야기와 새로운 스타일이 충돌하는 순간, 그 순간에 의해 새로운 영상,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또 다른 순간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면, 사실, 그가 낡은 이야기를 선택한 것 자체는 그다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의 스타일이 그 이야기를 멋지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스타일을 뒷받침할 만한 긴장감 있는 이야기에 대해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이야기를 창조해내지 못하고, 전형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에만 의존하는 자신감 없는 스타일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찬란했으나 결국 이야기와 스타일 사이에서 진부하게 갈등하던 <형사…>는 스타일에 대한 열망을 채우지 못한 채, 그렇게 고개를 떨군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감으로 가득했던 영화의 도입부는,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영화로 치달았다. 이야기의 굴레에 갇혀버린 스타일은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반영화적’ 운명으로 스스로를 이끌었다. <형사…>는 ‘슬픈눈’의 슬픔이란, 그가 가면을 썼을 때, 아무런 주석없이 다만, 그 가면 사이로 그의 처량한 눈빛이 새어나올 때, 그에 대한 모든 상상이 가능할 때, 가장 강렬했음을 몰랐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