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의 학원강사 인영은 아침에 입원해 있는 엄마의 침대에서 잠을 깬다. 전날 아침 인영은 17살짜리 수강생 이석을 껴안고 학원 소파에서 잠들어 있다가 학생들에게 발견돼 학원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날 밤 친구와 술을 많이 마셨다.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병실에서 카메라는 인영의 등과 잠든 인영을 2인용 의자에 앉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상반신을 함께 잡는다. 인영은 잠을 깨 어머니에게 몇 마디를 건네고 의자에 내려앉는다. 어머니는 인영과 함께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침대에 오른다. 이제 두 사람의 위치는 이 장면이 시작할 때와는 정반대다.
일상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우아한 리듬
이야기 전개에서 빠져도 문제가 없는 이 사소하고 유머러스한 장면은 <사랑니>의 뛰어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응시와 대화, 그리고 부드러운 자리바꿈의 동작이 교차하는 이 병실 장면에는 말 그대로 무성영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랑니>는 아름다운 영화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려서도 아니고, 숭고한 인간애가 있어서도 아니며, 빼어난 색채와 빛의 윤무가 있어서도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움직임이 빚어내는 리듬, 그것의 미묘한 음악성 때문이다. 유심히 바라본다면 <사랑니>의 많은 장면들은, 심지어 귀를 닫고 보아도, 인물들의 움직임과 그 흔적들의 우아한 리듬이 있다.
동작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려면 차라리 무용 공연을 보거나 뮤직비디오를 보면 될 테지만, <사랑니>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안무로 느껴지지 않는 매우 현실적이며 매우 사소한 동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영화적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인영이 화장을 지우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움직일 때, 혹은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어갈 때, 혹은 아파트 계단을 달려 올라갈 때, 마음의 풍경이 실린 그 동작들과 그 동작을 이어가는 편집의 이음새에서도 배어난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랑니>의 이야기는 야심적이다. <사랑니>에는 유사한 두 계열의 이야기가 엇갈리며 진행된다. 그러다 두 이야기는 한 지점에서 만나고, 교차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만들어낸 뒤에 다시 엇갈리며 멀어진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인영, 이석, 정우라는 같은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세 인물의 나이는 한쪽에선 서른살이고, 다른 쪽에선 열일곱 살이다. 편의상 두 이야기를 이야기1, 이야기2로 나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후자의 인물들은 어린 인영, 어린 이석, 어린 정우로 부르기로 한다.
인영은 13년 전 첫사랑과 이름도 외모도 똑같은 어린 이석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그러다 영화의 4분의1쯤 되는 지점에서 어린 인영의 이야기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어린 인영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인영의 어린 시절의 회상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어린 인영이 남자 친구인 어린 이석을 찾아 인영의 학원으로 오면서 우리는 이 영화가 인영과 어린 인영,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 사이를 오가던 어린 이석은 결국 인영 곁에 머물고, 어린 인영은 홀로 남겨져 정우에게 슬픔을 말한다.
두 이야기는 복합적이고 미묘한 유사성의 계열을 형성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들이 겹겹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야기1에서 인영은 첫사랑을 상기시킨 어린 이석을 만나 사귀기 시작한다. 이야기2에서 어린 인영은 어린 이석의 쌍둥이 동생 이수를 좋아하다 이수의 죽음 뒤에 어린 이석에게 애정을 느낀다. 인영은 이석에게서 어른 이석의 과거를 보고, 어린 인영은 이석에게서 죽은 이수를 느낀다. 인영과 어린 인영이 다르듯 이석과 어른 이석은 같지 않고, 이수와 이석은 쌍둥이지만 별개의 인물이다.
순환의 현실을 긍정한다
닮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두 이야기에 번갈아 등장하는 사물들과 일화들은 반복되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이석의 지구본은 정우의 방 안에 놓인 지구본으로 돌아오고, 어린 이석과 육체적 사랑을 나눈 뒤 어린 인영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탁기는 인영이 어린 이석과 처음 밤을 보내고 나서 걸터앉은 세탁기로 돌아온다. 또한 엘리베이터 승강구에서 내려다본 어둠은 옥상 끝에 선 위태로움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윤리 교과서는 세계지리 교과서로 돌아오며, 버스의 소파는 학원의 소파로 돌아온다.
<현기증>에서 죽은 이 혹은 사멸한 것에 대한 매혹은 불안과 죄의식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결국 시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랑니>에선 그것들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오자 생은 활력을 얻는다. 그것은 과거의 것을 닮은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사랑한 것이 다르지만 비슷한 것이라면, <사랑니>의 인영이 사랑한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다. 그러니 외국에 있다가 갑자기 인영을 찾아온 이석이 인영의 성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때, 인영은 “생각해보니 둘이 하나도 안 닮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니>는 환생의 신화가 아니라 순환의 현실을 긍정한다. 인영과 정우, 이석, 그리고 어린 이석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꽃이다. 그리고 홀로 남은 어린 인영은 병원의 정원에 앉아 어린 정우에게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라고 말할 때 봄꽃이 눈처럼 날린다. 그 꽃은 지난해 진 그 꽃과 같은 이름이지만 그 꽃과 다른 꽃이다.
사랑은 든든한 뿌리를 내려 천년을 자라는 나무와 같지 않으며, 계절의 요구에 순응하며 단 한번 주어진 시간에 만개하고 때가 되면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사멸하는 꽃과 같은 것이다. 이듬해 그 자리에 다른 꽃이 필 것이다. <사랑니>는 체념을 긍정하고 숙명을 받아들이지만 이건 밝은 체념이며 쾌활한 숙명론이다. 인영의 치통은 비로소 그 긍정에 이르게 된 서른살 여인의 통과의례다. 그리고 어린 인영은 자신이 진 자리에 다른 이름의 꽃이 피어나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아직은 어린 소녀다.
당연하게도 <사랑니>의 성취는 사랑에 대한 이 예민한 통찰에 있지 않다. 또한 그 통찰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있는 서사 자체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움직인 흔적들, 공간과 사물이 남긴 이미지와 기억들이 견고한 서사를 구성해가는 그 방식에 있다. 김혜리가 지난주 <씨네21>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사랑니>는 사랑의 추상화다.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감정이 빚어내는 리듬과 무늬의 영화다.
대도시나 근교나 시골의 특정한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이 영화의 공간은 탈지역적이며 이 영화의 인물들은 심리적 동일성은 유지하지만 계층이나 시대에 종속되지 않는 보편적 감정의 전달자다. 두 이야기의 시간적 밀도 차이로 인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인물과 공간과 사건과 감정의 고유성과 절대성이 부인되는 유사성의 순환을 구조화하고 시각화함으로써, <사랑니>는 영화적 서사의 한 진경을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