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이태성 선수, 1루 베이스 돌았습니다, <사랑니>의 이태성
2005-10-10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10년 전 어느 초등학교의 방과 후 운동장을 그려보자. 공을 모는 망아지 떼 같은 사내애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그때 홀연히 나타난 한 할아버지가 무리 중 한 소년에게 던져보라며 돌멩이를 건넨다. “관심 있으면 연락해라.” 돌멩이가 그린 포물선이 흡족했는지 노인은 종이 한 장을 쥐어주고 돌아섰다. 휘잉 바람이 일면 꼬마의 손에 들린 리틀야구단원 모집 전단의 인서트. 아다치 미츠루 만화 <H2>나 <터치>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초등학교 5학년 이태성 어린이는 그렇게 야구선수가 됐다. 청소년 국가대표팀 투수로 발탁된 체육특기생 소년에게 인생은 이미 스케줄 잡힌 고된 리그전이었다. 맨날 똑같은 운동장에서 똑같이 구르며 똑같은 친구들과 먹고 잤다. 외박하는 토요일마다 우르르 목욕탕에 들렀다가 영화를 한 편씩 봤고, 드라마는 밥 먹을 때 합숙 동료 2,30명과 둘러앉아 봤다. <올인>의 이병헌이 멋지다고 잠시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대통령배 대회에서 어깨 근육이 찢어졌다. 단순했던 인생 설계도 함께 찢겨나갔다. 어린 ‘전직’ 야구선수는, <사랑니>의 이석과 반대로, 하고 싶은 일은 없어도 대학은 가고 싶었다. 연기학원 입시반에 트레이닝 복을 걸치고 등록한 소년은 세련된 배우 지망생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대덕대 모델과에 입학했지만 오디션 문턱은 높았다. <얼굴 없는 미녀> <발레 교습소>에 떨어졌고 <슈퍼스타 감사용>이 그를 2루수(구천서)로 뽑았다. ‘야구 디렉터’의 일도 같이 맡았다. 선배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스물의 단역 이태성의 가슴 한 구석이 외쳤다. 이건 그저 흉내일 뿐이야. 야구의 백만 가지 감정을 아는데 표현할 기회도 능력도 없었다. 애가 탔다. 아, 내가 좀더 괜찮은 배우라면!

스무 살 여름. 이태성은 <사랑니> 1차 오디션에 낙방했다.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다 찍어 개봉을 했어야 마땅한 <사랑니>는 아직도 여주인공의 어린 애인 이석을 찾고 있었다. 두 번째 기회. 튀어야 질문 하나라도 더 받는다길래 뻗친 머리에 야한 재킷을 입었다. 정지우 감독이 말했다. “재킷부터 벗고 하죠.” 이태성은 시네마 서비스 화장실에서 찬물로 머리 감고 휴지로 물기를 털었다. 과제는 형만 편애하는 엄마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독백이었다. 감독은 연습하라고 두 시간 동안 방을 비워주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소년이 아는 오디션의 우주란 “수고했어요. 연락드리죠.”가 전부였다. 빈 방에 갇혀 별 수 없이 읽고 또 읽었다. 연기하느라 운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뺨이 흥건했다. 감독의 다음 숙제는 희곡에서 추린 다섯 개의 독백. 도무지 입에 안 붙었다.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인터넷 지식검색으로 <늑대의 유혹>과 <베스트 극장> 대사를 손수 뽑아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면접. 김정은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의 광팬인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태성은 인생 고비마다 큰 힘이 되어준 포털 지식검색에 지금도 감사한다.

신인 주연이라니 무슨 연줄이냐는 웅성임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태성은 주연이라서가 아니라 배울 것 천지라 행복했다. 정지우 감독은 열정덩어리였다. 열심히 안 하면 내가 나쁜 놈이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우리는 선후배도 스타와 신인도 아니야. 단지 파트너야.” 첫 문자 메시지부터 감동이었던 김정은 누나는 에너지 배분의 요령을 몸으로 가르쳤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잠드는 신에서 연출 지시는 한 마디였다. “자라!” 스탭들이 에어콘을 틀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발소리를 죽였다. 이태성은 이내 잠들었고 선생님(김정은)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야 깼다. 그 모습 그대로 영화가 됐다. 그래, 진짜 자다 깬 얼굴과 자는 척하다 눈 뜬 얼굴은 다르구나. 선생님과 오붓한 시간이 방해받아 토라진 장면에선 함구령이 떨어졌다. 정은 누나와 수화로 소통하며 사나흘을 젓가락 껍데기만 꼬았다. 갑갑하고 부루퉁한 얼굴이 고스란히 찍혔다.

스물한 살 이태성은 열일곱 소년을 연기하며 거꾸로 남자가 됐다. “여자 친구도 있었지만, <사랑니> 찍는 동안처럼 누굴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감정을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어요.” 그 여자, 섭섭하겠다. 이태성은 인영의 시야에 충실한 영화 <사랑니>에 보이지 않는 이석의 세계를 만들어내느라 부쩍 늙었다. <사랑니>에서 이석은 껴안은 인영의 어깨 너머로 죽은 엄마의 추억을, 죽은 형의 얼굴을, 아버지의 고독을 보고 있다. <사랑니>를 마친 이태성은 예체능이 한 단어인 이유를 알겠다. 연기도 운동도 결국은 자기 몸으로 느껴야 해내는 일이라서다. 몸이라면 자신 있다. 체중부터 제스처까지 자기 몸을 어찌 다스릴지 잘 아는 이태성은, 영화를 위해 사나흘 만에 9kg을 불렸고 촬영 후 6kg을 뺐다. 그나저나 <사랑니>처럼 친절한 작품만 앞길에 줄 서 있을 리가 없다. 각오는? 전직 야구선수가 말한다. “패전하는 거, 기다리는 거 익숙해요.” 연기는 몇 이닝에 끝날지 모르는 게임인데 뭘 의지할까. 젊은이는 대뜸 종교를 말한다. “사람 마음으론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도 믿는다고 덧붙인다. “운동할 때 맞고 다치고 힘들어도 괜찮았어요. 오늘 맞으면 내일은 안 때릴 테니까.” 아직 어린데 그런 말을! 탄식하려는데 담담한 두 눈이 말린다. 그런 얼굴은 나이 든 게 자랑인 어른들이나 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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