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승우·강혜정 주연의 <도마뱀> 찍는, 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
2005-10-07
글 : 김수경
사진 : 이혜정
“무조건 캐스팅되는 영화, 슛 들어가는 영화를 지향한다”

국가대표 영화 카피라이터, 연간 50만명의 네티즌이 방문하는 개인 블로그의 주인공, 5년 넘게 주요 일간지와 영화잡지에 글을 연재하는 칼럼니스트, 강우석 감독이 공인한 ‘영화광고의 천재’이며 충무로 16년차인 씨네월드 정승혜 이사가 영화사 아침을 차렸다. 그녀는 1989년 신씨네에 입사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1991년의 씨네씨티를 거쳐 1992년에 문을 연 씨네월드의 창립멤버로 참여한다. 배우 박중훈은 그들을 “두명의 천재와 한명의 휴머니스트”라 칭하고 쇼이스트 김동주 대표는 “충무로에서 가장 빛나는 기획영화집단”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강우석 감독이 “정승혜가 나가면 시네월드는 망한다”고 지목했던 정승혜는 김동주, 김미희 같은 절친한 친구들이 승승장구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영화사를 차렸다. 창립작은 화제의 커플 조승우와 강혜정이 출연하는 멜로영화 <도마뱀>이다. 씨네월드가 만드는 영화 대부분의 논의와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충무로 카페에서 1965년생이지만 대단한 동안인 그를 만났다. 달변의 정승혜가 말하는 충무로, 그리고 <도마뱀> 이야기.

-“이모부, 고모부 같다”던 이준익, 조철현 대표에게서 독립해서 ‘아침’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독립보다는 구조만 약간 달라진 거라, 같이 작업하는 본질은 변한 게 없다. 하지만 영화사 아침을 차리고 <도마뱀>을 찍기로 결정한 건 두 어른이 기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심청이의 마음으로. (웃음) 영화사를 차리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나는 떠밀려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청개구리다. 하지만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이유 불문하고 충실히 임한다. 그런데 이번에 하지 않으면 우리(씨네월드)가 위기에 봉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전에 봤던 카페 이름에서 회사명을 만들어내고 3월에 법인 등록을 했다. 내가 16년 만에 영화사를 차린 것보다는 사장님과 조 대표님이 맞물려서 쉬지 않고 제작에 들어간 사실이 제일 기분 좋은 일이다. 영화사를 빨리 차리려고 했다면 프로듀서를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데스크 타입의 인간이다. 오랫동안 프로덕션보다는 프리 프로덕션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씨네월드의 구조를 봐도 내가 브레이크 역할을 하지만, 두분이 결정을 하시면 무조건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내적으로는 남성적인 취향이 강하고 일 진행이 빠른 점도 작용했다.

-<도마뱀>이라는 창립작을 내놓기까지 준비 과정이 궁금하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것도 행운이지만, 이제까지 내 가장 큰 복은 싫은 일을 안 하고 산 것이다. 내가 싫은 일은 이준익 사장님과 조철현 대표님이 다 해주셔서 그동안 행복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카피를 쓸 때도 언제나 시간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감독이나 PD는 언제 들어가도 자신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제작부와 연출부들에게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 계약을 못해주니까. 그들에게 미안해서 계약과 상관없이 차비로만 쓰라고 내 돈으로 30만원씩 줬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라서 그랬다. 7∼8개월 캐스팅이 난항을 겪는 경우는 흔하지만 직접 당하니까 너무 괴롭더라.

-사람들이 놀라는 만큼 <도마뱀>의 캐스팅 과정에는 진통도 상당했을 것 같다.

=누구는 나에게 ‘배우한테 페라가모 짝퉁 핸드백 한번 안 사고, 술 한잔도 안 사는 네가 어떻게 그런 캐스팅을 하루아침에 했냐’고 하더라. 노력도 많이 했지만 운도 따라줬다. 무엇보다 성격 때문에 이런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도마뱀>을 다른 캐스팅으로라도 급하게 간다고 생각했다면 이미 영화가 진행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좀 느긋한 성격이다. 옆에서 지금 타이밍에 강남으로 달려가 매니저를 만나야 한다라고 해도 나는 내 방식대로 시나리오를 주고 기다린다. 감독과 PD는 성격들이 좀 급한 편이라 걱정했지만, 나는 무조건 이게 내 창립작이고 다른 작품을 당길 수는 없다는 방침으로 계속 기다렸다. 게다가 여름에 꼭 찍어야 하는 중요한 장면이 있어 크랭크인 날짜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크랭크인 20일 전에 캐스팅이 완료됐다. 나 혼자서 해결하는 일은 5분 내에 모두 해결할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일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도마뱀>은 캐스팅이 안 되고 늘어진 게 아니라, 남녀끼리 안 맞고 타이밍 때문에 엇갈리고 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진짜 고마운 사람은 강혜정이다. 너무 바쁜 배우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시나리오도 안 줬다. 그랬던 강혜정이 이 영화에 합류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오히려 조승우에게는 시나리오를 먼저 줬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인 그는 뮤지컬 <헤드윅>에 전념하기 위해 일단 고사했다. 나중에 강혜정이 합류한 이후에도 둘 다 되면 좋겠다고는 바라지 않았다. 다른 남자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혜정은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이후에 벌어진 조승우의 캐스팅 과정은 무조건 비밀이다. 사실은 투자사에 두명의 캐스팅 카드를 쥐고도 조승우쪽은 포기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라도 기뻐할 캐스팅이지만, 너무 좋은 캐스팅이 첫 작품에 무리를 주는 요소도 있다고 판단해서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시네마서비스 김인수 대표께서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을 통해 지금 캐스팅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다시 말하지만 강혜정은 이 고된 과정에서도 매번 “뭐 어때요, 우리가 잘하면 되죠”라고 힘을 실어줬다.

-5회차 진행된 <도마뱀>의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 그리고 주로 현장에서는 누구와 어울리는가.

=스탭들이랑 제일 친하다. 이를테면 “어이! 잘생긴 총각, 신분상승이 뭔 줄 알아? 제작자랑 결혼하는 거야”라고 농담을 건넨다. (웃음) 다른 건 필요없으니 부모님 허락만 받아오라고 한다. 지난번에는 철봉에 올라가 우리 아역배우 권태와 철봉 꼭대기에 앉아 1시간 동안 감독님 흉내를 내고 놀았다. 걔네 엄마랑 나랑 동갑인데 나한테는 누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예쁜 두 주연배우가 가끔 손잡고 현장을 거닐며 카메라의 안팎에서 예쁘게 연애 중인 모습을 바라본다.

-‘충무로 살롱의 마담’이라는 별호는 유효한가? 예전처럼 요즘도 사람들이 씨네월드 사무실로 모여드나.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예전에 광고할 때 특히 그랬지. 내가 7∼8개의 영화사 일을 하고 있으니까 담당자를 비롯해서 씨네월드에 오면 웬만한 사람들은 만난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영화 담당 신참 기자들도 많이 몰려왔다. 요즘도 드문드문 오지만.

-800편, 1만개가 넘는다는 카피는 그럼 이제 그만 쓰는 것인가.

=설마. <친절한 금자씨> 카피를 최근에 썼다. 예전에는 전단에 있는 모든 문구를 썼으니까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1만개가 넘긴 할 것이다. <오로라 공주>도 썼다. ‘다섯명을 죽였다.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 오랜만에 지르는 느낌의 파워풀한 카피를 써서 기분이 좋았다. 상대적으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엄마 등등 단어를 빼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예전에는 남성영화 <투캅스> <공공의 적> 같은 영화에 강한 카피를 많이 썼다. 장르적으로는 형사물, 에로, 코미디에 강한 편이다. 지구를 부수는 이런 정서의 블록버스터는 좀 약하다. 컨셉이 명확한 영화를 잘 쓰고 좋아한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 공윤(공연윤리위원회, 영등위 이전에 있던 심의기관)에서 뭐 이런 애가 다 있니, 이러면서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런 시대를 겪으면서 내가 얻은 것은 순발력이다. 다음날 재심을 받으면 바로 대처를 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고괴담>처럼 4개월간 상영이 지속되면 그것에 준하는 새 카피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런 순발력과 끈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영화를 보고 모니터링해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대세를 보고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내 판단대로 이야기해야 상대에게도 도움이 되니까. <실미도> 편집실에서 첫 시사를 봤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더라. 그래서 강 감독님에게 영화 무지 촌스럽네라고 내가 입을 뗐다. 무지 촌스러워서 되게 잘되고 나이대 구분없이 많이 들 것 같다고 이야기했더니 웃으시더라.

-1989년부터 시작했으니 한국 영화산업의 급성장을 고스란히 몸으로 경험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일단 영화의 주인이 너무 많아졌다. 책임감이 분산되는 면도 있지만 책임 회피가 용이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조건 담당자, 혹은 결정권자와 직접 이야기하고 의견을 들었다. 사장님이 여든이건 스무살이건. 지금은 그런 게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서포터로서 최고라는 말을 들어서 즐거웠다. 시나리오 표지를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수백권 읽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포스터와 디자인을 만드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망하더라도 왜 망했는지를 설명하고 공감해야 했다. 스스로가 카운슬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광고를 했다. 대화를 통해 카피를 한줄 쓰는 것보다는 컨셉을 논의하고 영화의 방향을 함께 잡는 것이다. <왕의 남자>도 제목을 내가 지었는데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게이영화 같다면서 대부분 반대하더라. 그때 내가 세상에 왕의 것이 아닌 것이 뭐가 있느냐고 설명했다. 그 남자도 왕의 것이라는 거지. <도마뱀>도 비슷하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여주인공 아리의 캐릭터를 생각해서 <도마뱀>이라고 한 거다. 설명을 한줄만 해주면 반응은 달라진다.

-<도마뱀> 이후의 라인업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날의 분위기>와 <라디오스타>가 뒤에 버티고 있다. <그날의 분위기>는 심플하고 재밌는 멜로다. 욕심내는 배우들이 있어 캐스팅도 무난할 것 같다. 내년에 만들 <라디오스타>는 맛이 간 록스타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스케줄을 여전히 잡아주는 근사한 매니저의 이야기다. 박중훈이 시놉시스를 메일로 받고 3시간 뒤 무조건 하겠다고 답해줬다. (이번호에 게재된 ‘김혜리가 만난 사람-안성기 편’의 마지막 문답을 보면 매니저 역으로는 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침에서 지향하는 영화는 캐스팅되는 영화, 슛 들어가는 영화다. 책상 밑에 있는 영화는 소설로도 못 쓰고, 서점에서 팔 수도 없다. 그리고 목표는 우리 직원들과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은 우리가 맛있는 걸 집에서 싸오지만, 나중에 다 사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흩어졌던 우리 멤버들 다시 다 불러모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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