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씨네21> 기자들에게 일종의 극기훈련장으로 통한다. 매일 30쪽 가까운 데일리 뉴스를 발행하자면 끼니를 거르고 잠을 줄이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는 기자들은 영화제인 만큼 보고 싶은 영화 실컷 볼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기 마련이지만 정작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경우는 영화제 기간 9일을 통털어도 다섯번을 넘기 힘들다. 그래서 가끔 난 이번 영화제에서 1편도 못 봤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나면 등골이 서늘하다. 그럼 대체 뭐한 건가, 나는 뭘 하는 인간인가, 하는 자괴감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영화 보는 즐거움을 잠시 접어두고 영화제 기간 동안 매달리는 일은 물론 영화제에 참가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 대상이 희귀할수록, 가슴 설레는 일이고 그렇게 만난 게스트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감동적인 모습을 보일 때 한 방울 보람이 이마를 적신다. 내겐 2000년 영화제에서 배용균 감독을 만난 일이 그랬다.
1989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그 해 딱 한번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그가 국내에서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고작 관객과의 대화를 참관한 것에 불과하지만 나로선 배용균 감독을 실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건 1998년 그의 두 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개봉을 앞두고 그와 서면인터뷰를 진행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직접 만나는 것을 꺼린 그는 내가 보낸 40개의 질문에 성심성의를 담은 대답을 적어 팩스로 보내주었다. 몇몇 글자의 식별이 어려워 다시 보내달라는 얘기도 팩스로 전했고 보내준 답변의 양이 워낙 많아 줄여달라는 얘기도 팩스로 해야 했다. 무척 불편했지만 그는 그런 불편에 개의치 않았다. 혼자 촬영, 조명, 미술, 편집을 다 하는 작업방식을 택하는 완벽주의자답게 세상과 자신의 거리를 딱 그만큼 유지하려 했다.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상이 그를 은둔자로 부르는데 대해 이렇게 답했다. “언론에서 나를 은둔자라고 이름 붙인 건 세상의 편견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하는 사람의 생리상 자기 작품에 충실하자면 불필요한 일에 등 돌린 채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첫 영화를 만든 지 5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세 번째 영화도 5년 뒤인 2000년쯤 완성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다음 영화는 10년이 지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지금 어디에선가 영화를 찍고 있다는 풍문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나는 온전히 혼자 힘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럴 경우 작가가 감당해야 할 고독과 난관을 짐작조차 못하겠다. 한국영화가 고성장 산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 시대엔 더욱 더. 그러나 그의 길이 영화를 머니게임으로 이해하는 지금 세태에 다시 한번 되짚어야 할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임은 분명하다. 아무쪼록 배용균 감독이 무사히 세 번째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