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장한가> Everlasting Regret
2005-10-09
글 : 김도훈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어라. 당나라 백거이는 양귀비의 일생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애닳은 한으로 닫았다. 왕안억(王安憶)의 또다른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관금붕의 <장한가> 역시 유장한 어조로 한 여인의 삶을 노래하는 서사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름다운 소녀 왕치아오는 우연한 기회에 사진사 장씨의 눈에 띄어 미스상하이선발대회에 나가 입상한다. 청초한 제비꽃처럼 수수하던 소녀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깨닫는 순간 장미로 화한다. 왕치아오에게 아름다움은 양면의 날. 남자들은 왕치아오의 곁에 끊임없이 다가와 한순간에 사라진다. 정부 관리는 브라질로, 거부의 아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왕치아오의 단짝 친구 역시 변화하는 중국의 기운을 거부하며 홍콩으로 간다.

그러나 귀부인에서 홀어미로 전락한 왕치아오는 과거의 기억을 품은 상하이를 떠날 생각이 없다. 1947년에서 1981년까지,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여인의 인생 또한 닳고 닳아 사라진다. <쾌락과 타락>과 <란위>로 조금 더 현실적인 땅에 발을 붙이고 섰던 관금붕은, <장한가>를 통해 다시 <완령옥>과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의 세상, 사라지는 도시에 대한 기억들과 변화를 못내 아쉬워하는 회고의 정서로 귀환했다. 하지만 관금붕은 예전보다 좀더 냉담하다. 타고난 로맨티스트였던 그는 왕치아오의 비극적인 최후마저 몇줄의 자막으로 대신 알릴 뿐이다. <화양연화>의 미술감독 장숙평이 그려낸 40년대 상하이의 고혹적인 붉은색마저 차갑게 서려있다.

이 작품을 허우샤오시엔의 <해상화>와 왕가위의 <화양연화>에 대한 관금붕의 대답으로 읽는 것도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앞의 두 영화와는 달리 <장한가>는 상하이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거의 지니고 있지않다. 오히려 관금붕은 인간이 아니라 죽어버린 도시의 기억을 잠시 촛불처럼 되살려내는데 집중한다.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도시와 인간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그의 말처럼, 쉽게 썩어문드러질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은 역사의 변화를 지탱하지 못한 채 바스라질 뿐이다. <장한가>는 관금붕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중 하나지만, 가장 메마르고 비정한 눈길로 인간사를 바라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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