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라운지의 넓은 창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는 류승범의 뒷모습은 건조해 보였다. 일요일 정오,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만난 그는 평소처럼 밝게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하는 류승범에게는 <주먹이 운다>의 상환이 보여주는 괴력의 몸부림도 <품행제로>의 중필이 일삼던 엽기적인 행각도 전혀 겹쳐지지 않는다. 그는 “요즘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들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로서의 매력은 작품에서만 보여줘도 충분하니까”라고 입을 뗀다.
<주먹이 운다>에서 야수처럼 달려드는 상환을 연기했던 류승범이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 <야수와 미녀>를 다음 순서로 정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주먹이 운다>는 매우 좋은 작품이고 기억에도 오래 남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빨리 털어내야만 했다. <야수와 미녀>는 <주먹이 운다>와 성격이 판이하고 전작의 강인한 캐릭터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전작의 느낌이나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다음 작품을 택한다”라고 류승범은 이를 설명한다. <야수와 미녀>는 “커플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사건이 꼬리를 무는 기존의 로맨틱코미디와는 조금 다른”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숨어서 지켜보며 고민하는 한 남자와 그를 찾아헤매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장해주(신민아)는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하지만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준 애인 구동건(류승범)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동건은 자신의 ‘야수’ 같은 외모 때문에 ‘미녀’ 해주 앞에 나설 수가 없다. “<야수와 미녀>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연인을 그린다. 관객은 동건과 해주가 만나거나 우연히 부딪히기를 기다리며 다른 방식의 긴장감을 느낄 것”이라고 그는 예상한다.
결국 류승범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정서적으로는 짠하고, 보듬고 매만지는 멜로영화”는 이번에도 아닌 셈이다. “예전에는 스스로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최근 최동훈 감독과 함께 작업한 리쌍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짧은 분량이지만 절절한 순애보로 출연했다. 최 감독은 “한손에는 꽃을 들고, 한손에는 벽돌을 쥐고 자신의 여자를 찾아나서는 인물”이라고 그의 캐릭터를 설명했다. 우연일까 오늘 촬영할 <씨네21>의 표지 컨셉도 ‘꽃다발을 들고 행복하게 데이트에 나섰다가, 오지 않는 연인에게 바람을 맞고 허탈해하는 남자의 하루’를 그려낸다.
류승범이 가진 배우론도 ‘홀로 가는 길’이다.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류승범도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 자기 방식대로 기다리는 타입이다. “연기는 누가 가르쳐줄 수 없다. 하지만 예전처럼 배우라는 자의식만으로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류승범은 말하자면 ‘연기의 독학자’이다. 그는 평소 자신의 연기를 위해 남의 영화를 보는 경우가 거의 없는 배우다. 더욱이 “남의 연기를 참조하여 어떤 캐릭터를 구축하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야수와 미녀>의 동건 역을 분석할 때도 그는 <아라한 장풍대작전> <품행제로>를 비롯한 자신의 전작들을 반복해서 꼼꼼히 살펴보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판단했다. 다른 작품을 준비할 때도 이 과정은 동일하다. 평소 불특정한 캐릭터를 상상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특별한 취미도 없고, 평소 집에 있을 때면 혼자 2∼3시간을 멍하니 생각하며 보낸다”는 류승범은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미친놈처럼 혼자서 실연해보고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낙담한다”고. 이러한 일상에서 반복된 이미지 트레이닝은 현장에서 그에게 “순발력과 자신감, 그리고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하느님이 나에게 정해준 배우라는 행운이 평생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짧으면 10년, 길면 20년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류승범은 현재로서는 “행복한 연기와 쉬는 동안 술마시는 일” 외에 다른 일은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약관의 데뷔 이후 오지혜를 비롯한 여러 선배들에게 ‘애늙은이’ 소리를 자주 들었던 충무로 6년차의 이 남자배우는 이제 “자기 나이에 걸맞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로 삶의 지론을 바꿨다. “24시간 내내 배우로 살거나 배우인 척하는 사람은 여백이 없어 보여서 싫다”는 류승범은 자신이 1년 중 배우로 일하는 8개월에서 10개월쯤을 제외한 평범한 삶의 시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저 스물여섯살 먹은 평범한 친구, 애, 형, 동생으로 여기며 대해줬으면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재삼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화든 뭐든 나를 미치게 하고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살도록 만들 그런 대상과 화끈하게 사랑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10월 말부터 류승범은 “언제나 현장에서 너무 열심히 연기해서 같이 출연하는 배우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훌륭한 형이자 선배” 황정민과 함께 최호 감독의 형사물 <사생결단>에 “얼음 같은 1월의 바닷물에 몸을 내던지는” 이상도 역으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