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그랬을 것이다. <러브 액츄얼리>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볼 때, 우린 생각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사랑의 소리가 소곤댔다면, 곳곳에서 이별의 소리도 흐느적댔을 거란 사실. 사랑과 달리, 이별은 감춰지는 것이라서 그랬던 걸까. 지난 1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정우성은 말한다. “이별은, 말하자면 사진 앨범을 바꾸는 순간쯤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고.” 그는 곱게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사랑 앨범’으로 가봉된 <새드 무비>의 주인공 진우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진우는 소방관이예요.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워낙 직업이 위험하다 보니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머뭇머뭇 하는 순수한 인물입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그가 출연작을 골라왔던 “첫번째 잣대는 배역의 ‘인간미’” 다. 사랑해서, 소방차 사이렌만 들려도 제 마음이 먼저 다친다는 수화 통역사 수정(임수정)에게 진우는 화재 현장의 폐쇄회로 화면 앞에서 죽기 전 프로포즈를 한다.
“진우가 ‘마지막’ 욕심을 부린 건데, 나라면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수정이 새 삶을 시작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이기주의다.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염정아)가 아들(여진구)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기억, 놀이공원의 거리 화가 상규(이기우)가 청각장애인 수은(신민아)을 그린 초상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숙현(손태영)을 떠나보내는 하석(차태현)은 모두 상대의 새 삶을 얽어매는 굴레다.
“<비트>가 끝난 뒤 멜로를 많이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는 그의 필모그래프에 정통 멜로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년)에 바로 이어 자리잡은 <새드 무비>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 영화의 출연은 그에게 “누군가 갈구하고,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의 근원성과 함께, 제 감성의 지축을 가장 크게 흔든 <천장지구>를 통해 새겨져 있던 ‘정우성표 감성 연기’의 유전자를 일깨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타 일곱 명이 처음으로 모여 어근버근할 수밖에 없는 포스터 촬영현장의 분위기를 앞장서서 부드럽게 이끌었던 그가 “경력으로 치면 병장급이지만”이라며 맑게 웃는다. “병장은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고 했더니 “대개 그렇지만, 같은 일 하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따뜻하게 다가가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묻는다.
오는 23일 <중천>을 찍기 위해 중국 항저우로 떠난다. 네덜란드에서 <데이지>를 찍고 들어온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천>이 끝나는 2006년 가을께, 자신이 직접 감독하는 영화를 찍을 참이다. 오래 별러 왔던 일이다.
새 인생이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지점인데, ‘대박’ 터뜨린 영화를 남기지 못한 게 아쉬울 듯하다. “망한 영화가 한 편도 없다는 게 기쁜 일”이란다. “1등 지향주의가 지나친 건 문제예요. 이젠 관객 1천만명이 1등이라 그 아래 수치의 영화는 잘 기억하질 않거든요.”
이별은 중요치 않다. 사랑이 있기에 이별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새드 무비>는 복음처럼 전한다. 네 커플이 우연을 가장해 만날 때마다 이별의 정서는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지만, 감흥이 확대재생산되는 폭은 그에 못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