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혼돈의 행복이여, 다시 한번, <사랑니>의 정유미
2005-10-17
글 : 오정연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사랑니>의 어린 조인영. 그는 매순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인물이다. 17세의 조인영을 연기한 21세의 정유미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 속 조인영을 똑 닮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마주하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든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 된 기자를 당황하게 한 것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겠다는 각오마저 느껴지던 그 눈빛이었다.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에 따르면 그는, 차안에서 이석(이태성)의 무릎을 베고 있다가 급하게 뛰어내려야 하는 장면에서, 차가 멈추기도 전에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리는 바람에 주위를 놀래켰다. “근데요, 그렇게 누워 있으면 차가 섰는지 안 섰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카메라에선 보이지도 않는 차 안에서도, 그는 실제로 이태성의 무릎을 베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열일곱 조인영이, 서른살 조인영에게 돌아간 이석의 뒷모습을 보며 쓸쓸하게 역사 안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선 이미 카메라에서 벗어난 뒤에도 컷사인이 날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마음은 무너지는데 발걸음은 떼어지는 인영의 처참한 감정을 그대로 곱씹으며.

요컨대 그는, 카메라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법을 아직도 터득하지 못했다. 영화인들에게 그의 얼굴을 알린 영화는, 작년 한해 내로라 하는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던 디지털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 정유미의 서울예전 영화과 선배인 김종관 감독은, 짝사랑의 대상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작동법을 문의하는 소녀의 표정을, 스펙터클로 밀어붙이며 반나절 만에 촬영했다. 6분20초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그대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는 멀리서 가까이서, 혹은 아주 가까이서 반복해서 잡았다. “정말 영화 속에 빠져 있다가 한 테이크가 끝나고 실제 나로 돌아올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소름끼친다”며 영화 속 소녀처럼 상기된 표정을 짓는 그는, 매번 카메라 앞에서 실제로 허둥거리며 사랑에 빠졌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큰 스크린에서 처음 확인했을 때나, 완성된 <사랑니>를 극장에서 봤을 때, 심지어 인터뷰 직후 이루어진 사진 촬영에서 자신의 사진을 모니터링할 때도, 그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아, 이런 거구나” 혹은 “내 모습이 이렇게 보이는구나”라고. 그에게는 아직도 카메라 속, 혹은 스크린 위의 자기 모습이 낯선 탓이다. 그는 사실 그 모습이 낯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신기한 이질감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작은 유명세를 안겨준 <폴라로이드 작동법> 이후, 정유미는 매니지먼트사에도 소속되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영화의 오디션에도 불려다녔다. 그러나 “무조건 프로필을 넣고, 무조건 오디션을 봐야 하는” 그 생활에, 그는 도저히 진심을 담을 수 없었다. “단역이든 조연이든 내가 간절히 하고 싶은 걸 해야 할 텐데 대부분의 경우, ‘내가 이걸 왜 해야 되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두달이 못 되어 그는 매니지먼트회사를 나왔다.

조급하고 성급한 것이 당연한 그 시기를 그렇게 담담하게 보낸 끝에 <사랑니>를 만났다. 그는 <사랑니>의 촬영 기간 내내 무조건 정지우 감독을 믿었다. “감독님은 한번도 뭔가가 틀렸다거나, 뭔가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어요. 그저 ‘이 상황에서 정말 그렇게 할까?’라며 질문을 던지셨죠. 아무리 어려운 장면도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어렵지가 않았어요.” 이석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인영처럼, 작은 질문 하나에도 정답에 가까워지려 애를 썼을 그가 눈에 선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또다시 힘을 얻었을 감독의 모습까지도.

“영화를 개봉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행복한 촬영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누군가 들었으면 질겁을 했을 만한 그의 소원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는 완성되어 관객을 만나고 있고, 그는 이제 영화에 빠져 있던 그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가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라는, 알쏭달쏭한 열일곱 조인영의 소원의 의미를 이제는 느끼고 있다는 점. 영화 속에서는 마지막이지만 실제로는 두 번째 촬영날 이루어진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당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대사를 그저 읊조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난 뒤 그 대사를 다시 녹음할 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혹은 조인영의 간절한 소원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니>의 열병을 통과한 정유미는 분명, 마지막 순간 돌아서야 했던 어린 인영과 달리 끊임없이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며 이석을 불러세웠던 어른 인영의 용기와 진심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학로 길가에 핀 꽃을 그대로 꺾어다가, 혼자 힘으로 시도했다는 어설픈 봉숭아물이 그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웃는다. 주인을 닮아선지 수줍고도 완강한 그 붉은 자리는, 첫눈이 내릴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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