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드 니로 되기’나 ‘메릴 스트립 되기’는 없어도 <존 말코비치 되기>는 있다. 존 말코비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궁금증의 대상이다. 직접 들어가서 머릿속을 훔쳐보고 싶은 미스터리한 집이다. 한번쯤 되어보고 싶은 그 무언가다. 그러나 자신이 출연한 영화와 자신에 관해 쓰여진 글을 대부분 보지 않는다는 이 배우는 그런 남들의 욕망이 두려웠다. “나는 언제나 꽤 운이 좋았다. 대중이건 언론이건 나를 흥미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내 인생에 침범해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걱정했던 건 오히려 그 선을 침범당하는 것이었다.”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제발 좀 내 이름은 빼고 다른 이름을 써서 제목을 짓자고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영화 속에서 존 말코비치는 무궁무진한 또 다른 존 말코비치의 자아들과 마주치는 진풍경을 겪어야만 했다. 존 말코비치에게 ‘되기’란 그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역점이다.
이 배우의 외양은 악역에 적격이다. 잔인할 것도 같다. 그래서 통념적인 인식에 따라 그는 악역을 많이 한다. 하지만 더러 웃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더 희한한 것은 입을 열 때마다 목소리에 풍요로운 화음이 배어 있고, 그 풍성한 목소리로 어떤 가치관에 대해서 논하거나 예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상당한 품격을 전달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악역을 하면서도 품격을 유지하는 희귀한 예다. 존 말코비치는 다양한 배경색으로 넓은 연기폭을 운신하는데, 아마도 현존하는 배우 중 그만큼 많은 배역을 탐식하면서도 퇴색하지 않고 빛을 발하는 배우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존 C. 라일리 정도밖에는 더 없을 것이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토킹 픽쳐>에서 막무가내 코미디영화 <쟈니 잉글리쉬>까지 책임질 수 있는 폭을 갖고 있는 배우는 흔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이 배우에게 영화의 특정성이나 작품성은 별게 아니다. 오로지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의 삶만 도드라질 뿐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존재 증명은 뭔가 되어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이 단 15분간만이라도 되어보고 싶어 안달하는 존 말코비치 자신이 오히려 오랫동안 되어보고자 열망했던 인물이 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톰 리플리다. 그 때문에 존 말코비치는 <리플리스 게임>에 애착을 느꼈고, 제작에 관련된 면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울 정도였다.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이 연기했고, 빔 벤더스의 <미국인 친구>에서는 브루노 간츠가 연기했고, 앤서니 밍겔라의 <리플리>에서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그 리플리.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 리플리는 결혼 이후 정착하며 살다가 또다시 광란의 욕망과 살인 제의의 게임 안으로 들어서는 리플리다. 이미 세편의 영화를 보았다면 쉽게 짐작하겠지만, 일단 리플리라는 인물 자체가 뭔가가 되는 것에 천재적인 범죄자다. 그리고 그 리플리를 뭔가 되어보고 싶도록 움직이는 것의 주인은 콤플렉스와 나르시즘이다. 콤플렉스와 나르시시즘! 만약 전작의 (매끈하고 중후한) 리플리들에 비해 존 말코비치의 캐스팅이 적절하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있으면,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그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콤플렉스와 나르시시즘의 전경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서 존 말코비치가 된다는 것은 그것들의 세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비록 <리플리스 게임>이라는 영화 자체가 큰 감동은 없을지 몰라도, 존 말코비치가 리플리를 연기한다는 사실만큼은 흥미롭다.
현재 존 말코비치가 또다시 되어가려는 대상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스탠리 큐브릭이다. 라울 루이즈의 <클림트>에서 그는 1900년부터 1918년까지의 클림트를 연기한다. 세기말의 위대한 화가로, 혹은 엄청난 여성 편력으로 14명(!)의 사생아를 남기고 죽어 ‘빈의 카사노바’로 불렸던 구스타프 클림트. 또는 스탠리 큐브릭이 <아이즈 와이드 셧>을 찍을 당시 그를 사칭하고 다닌 어떤 남자의 실화를 다루는 <컬러 미 큐브릭>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을 사칭한 그 사람을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다. 그 사람 역시 한순간이라도 스탠리 큐브릭이 되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인데, 그러고보니 존 말코비치가 그 역을 맡는 것은 또다시 흥미로운 일이다. ‘되기’란 존 말코비치에게 존재 증명의 여러 갈래 길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