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불안정한 사랑의 까다로운 매혹, <사랑니>
2005-10-19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사랑에 대한 구조적 기획 <사랑니>

수학 선생님, 다같이 만날까요?

주인공이 수학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영화 <사랑니>에서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영화의 실제 오프닝이 시작하기도 전 사운드트랙에서는 수학문제를 풀어주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문제를 풀고 있는 여자 선생님과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남학생. 이후 이중의 서사 구조라는 복합성을 띠게 되지만 <사랑니>는 사랑이라는 함수문제, 특히 미지수가 있는 함수의 그래프를 그려내는 영화다.

<사랑니>를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은 사람들이 유별나게 같이 만나는 장면들이다.

먼저, 조인영(김정은)이 자신의 첫사랑과 이름이 같은 이석(이태성)에게 마음을 두고 있고, 이석 역시 그러할 때.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막 뉴욕 모텔을 거쳐 (아직 함께 자지는 않았고, 그래볼까 하고 모텔을 갔다가 다시 나와) 햇빛 화사한 햄버거 가게에 마주앉아 있을 때. 조인영과 함께 살고 있는 정우(김영재)가 들어선다. 그리하여 조인영, 이석, 정우 셋이 같이 만나는 장면이 목격된다.

다음, 조인영과 같은 이름인 여고생 조인영(정유미)이 영화적 세팅으로 보자면 광명에서 출발해 서울 학원으로 이석을 찾아온다. 이석에게 목을 매는 여자친구가 있음을 간파한 조인영은 이석에게 간절하게 전화를 해댄다. 부재중이라는 메시지가 계속 나오다 통화를 하게 되자 조인영은 이석에게 여고생 조인영과 같이 만나자고 한다. ‘맛있는 것 먹자고. 이석은 돈이 없을 테니 같이 만나면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그래서 두명의 조인영과 이석이 만나게 된다.

세 번째. 정우는 조인영에게 그녀의 첫사랑인 이석이 프랑스에서 돌아왔으니 같이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정우는 나오지 않고 조인영과, 그녀를 최인영으로 기억하는 이석이 만난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조인영은 방년 열일곱살 이석을 집으로 초대한다. 정우에게 알아서 비켜달라고 당부했건만 , 정우는 서른살 이석까지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조인영과 두명의 이석 그리고 정우가 같이 만난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여러 사람이 같이 만나는 것 말고도 이 영화는 두명의 남녀의 만남에 개입하는 다른 만남들을 동시적으로 환기시킨다. 조인영과 고등학생 이석이 만날 때 그것에 개입하는 것은 동명이인의 존재다. 어린 이석이 조인영에게 ‘정말 이름이 조인영이냐’고 물을 때, 그는 여고생 조인영을 생각하고 있다. 또 어른 조인영은 그런 이석을 볼 때 자신의 첫사랑 이석을 투사한다. 반면 여고생 조인영이 이석을 만날 때 죽은 그의 쌍둥이형 이수의 죽음이 이들의 만남에 개입한다.

나는 개별적이거나 독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이렇게 겹쳐지는 관계들에 대한 고찰이 <사랑니>를 올해의 발견이라고 앞서 칭했던 김혜리 기자나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정감어린 평들과 더불어 이 영화가 제안하는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중첩된 이 관계들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위의 첫 번째 같이 만나는 장면에서 아마도 가장 예측 가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석일 것이다. 그는 내어놓고 질투한다. ‘왜 정우는 인영의 주스를 (함부로) 마시며, 그보다 왜 인영은 정우와 동거를 하는가?’그에 대해 인영은 정우가 자신의 친구라고 이석을 설득한다. 반면 정우는 이런 작은 소동에 짐짓 태평할 뿐만 아니라 이석이 다른 이석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두 번째 만남, 세 사람 모두 다소 예측 가능하게 행동한다. 모두 히스테리 폭발 일보직전이다. 두명의 조인영은 잘 차려진 한식 상을 앞에 두고 잘 먹지도 못하나, 이석은 약간의 폭식과 폭주를 한다. 여기서 쌓인 정신적 에너지는 한편으로 여고생 조인영과 이석의 관계를 쇠잔하게 하지만, 서른살 조인영과 이석이 잠자리를 갖게 한다.

세 번째 만남, 위에서 말했듯이 같이 만나자고 해놓고 정우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영화에서 가장 절묘한 겹치기 만남 장면이다. 조인영의 첫사랑 이석과 진행 중인 이석,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정우가 모두 출연한다. 이들 중 누구도 통상적으로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표출하는 질투, 최종적 선택의 강요, 폭주, 폭식 뒤의 난동질을 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이석이 슬쩍 그쪽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기는 하지만 정우와 게임을 한판 벌인 뒤 잠잠해진다. 그리하여 조인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애인을 자신의 집 마당에 사이좋게 배열하게 된다. 앞의 겹치기 만남 장면들은 이 장면을 화해조로 완성시키기 위한 리허설처럼 보인다. 특히 이 리허설들을 통해 관행적 코드대로가 아닌 이질적 관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이해에 다가선 사람은 이석인데, 그러한 이석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추수하는 사람은 어른 조인영이다.

이렇게 같이 만나는 장면들을 네 단락으로 놓고 보면 영화의 진행방향은 조인영의 판타지, 심리적 실재의 구성으로 향하고 있다. 판타지가 욕망의 세팅, 미장센이며 거기서 주체가 탈주체화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자면, 이 영화는 삼각, 사각관계의 로맨스가 구성되는 과정에 위치되고 배열되는 조인영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조인영이라는 서른살 여자를 규정할 어떤 본질적 특성이 영화 시작이나 끝부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인영은 끊임없이 관계들 속에 배치되어 그 차이와 특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른살 조인영의 이같은 배열과 더불어 교차되는 것은, 혹은 이 배열을 급진적으로 재배치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은 여고생 조인영의 등장이다.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의 시간, 심리, 시각적 구조의 관행을 절묘하게 뒤튼 이 방식은 특히 로맨스 장르에 근접하는 영화로서는 빛나며 독창적이다. 어른 조인영이 이석의 시선을 받고 자신이 이석을 응시하는 등의 ‘시선의 사건’이 일어난 뒤, 인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고생이 등장하고 또 이석의 얼굴을 가진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은 십중팔구 이 장면들을 과거로의 일별, 플래시백으로 생각하게 된다.

여고생 조인영이 어른 조인영을 찾아옴으로써 관객은 이제까지 플래시백으로 받아들였던 부분이(물론 의심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선 배우 김정은과 정유미 사이에는 형질적 유사성이 눈에 띄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뭐, 누군가의 아역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을 생각하면 핍진성에 근거해볼 수밖에. 더구나 이즈음은 성형이 유행이라 도무지…), 사실은 동시적 사건들이었음을 뒤늦게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뒤늦은 발견은 영화 구조의 변이 효과로는 탁월하지만, 어떠한 문제를 야기한다. 관객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린 어른 조인영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이제까지 본 것은 조인영의 과거가 아니라 다른 여고생 조인영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른 조인영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은 서른살 그녀가 선택한 사랑의 대상이 열일곱살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 것이 플래시백이라면 그 정황은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도록 읍소하는 것이 된다. 첫사랑이 될 수 있었던 남자가 사고로 죽었고, 그녀가 서른이 되어 등장한 17세 이석이 바로 그 남자와 모습이 같다는 것이다.

친숙한 낯섦-사랑의 언캐니한 공포

플래시백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위의 정황과 읍소 상황은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과거가 없는 어른 조인영을 현재의 배열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외부적으로 보자면 그녀의 삶에 깃든 간절함이란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어머니가 쾌히 승인하는 남자와 동거하고 있고, 학원에서도 감시하는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원장이나 아버지, 남편 등 어른 남자의 권위에 짓눌리지도 않고 건강을 잘 챙기고 있으며, 근무 환경도 비교적 쾌적하다. 플래시백이 오인이며 오해라고 밝혀진 이상 우리가 조인영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여지는 별로 없다.

그러나 플래시백이라고 믿었던 장면들에 등장했던 여고생 조인영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잠재적 남자친구인 이수의 사고를 목격했고 또 그 사고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믿기지 않는 때 이른 죽음에 더해 이수의 쌍둥이 동생 이석의 이수와의 언캐니(uncanny: 낯설면서 익숙한)한 유사성과 접한다. 어른 조인영과 여고생 조인영이 만남으로써 플래시백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여고생 조인영의 것이라고 밝혀지고 어른 조인영이 고등학생 이석과 호텔로 떠나게 되는 사이에 있는 시퀀스 중 조인영이 운전을 해 터널을 지나는 장면은 다가올 위협을 조명과 사운드로 예지하는 공포영화의 관행을 연상시킨다. 이 시퀀스가 담고 있는 관계들의 불안정과 불확정성, 그리고 특히 아프고 불안한 여고생 조인영이 발산하는 긴장감, 두명의 미성년의 관계에 끼어든 성인 조인영이 원하는 상대를 얻는 사태가 부여하는 불편함. 이 미묘하고 해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상황은 적어도 영화 구조상으로는 어른 조인영과 미성년 이석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것으로 완화된다. 이석이 어젯밤이 어떠했느냐고 묻자 인영은 포경 수술 안 한 남자 어른의 것은 처음 본다며 ‘예뻐’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물론 오류다. 육체적으로는 성장을 마쳤을 수 있으나 이석은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아니다. 그는 남자 어른이라기보다는 소년이다. 이후에도 여고생 인영은 계속 아프지만, 봄철 벚꽃은 피어나고, 그녀는 정우라는 친구에게 자신의 상처를 확인시킨다.

사랑에 대한 구조적 기획

여고생 조인영을 이렇게 위치시킨 서사적 배열상의 윤리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랑니>가 가진 까다로운 매혹의 원천은 주지하다시피 사랑이 ‘난제’, ‘미제’의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석이 수학 강사 조인영에게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성장통을 앓는 시기, 형이 갑작스레 죽었고 그 형의 여자친구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 난제의 시기, 조인영 선생님은 복잡한 문제를 자신감 있게 풀어내고, 그의 미래의 계획을 물어보아주고, 더구나 날씨가 궂은 날 차로 집에 바래다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영화의 진정한 난제는 수학 강사 조인영이 왜 이석에게 빠져드는가이다. 플래시백이 조인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알려진 사실.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도발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석이라는 이름이다(아마도 영화 <러브레터>를 반복 시청한 듯). 그리고 문제아에게 끌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자신의 다소 순조롭고 평탄해 지루한 삶에 이질적 패턴을 가져다줄 복잡한 문제를 지닌 어린 대상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점을 보러갔더니 무당은 인영에게 ‘복도 많은 년’이라고 말하지만 주변 남자들의 숫자가 점차로 증가한다는 것 외에 미성년 남자친구를 맞아 인영이 갖게 된 쉽게 긍정할 만한 사회적 복은 별로 없다.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밥값, 호텔비, 운전, 다 그녀의 몫이다. 거기다 열일곱살 소년은 조루라 서른살 인영은 하나하나 가르쳐야지, 스스로에게 다짐까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인영이 이석을 원하게 되면서 갖게 되는 감정의 풍요로움은 김정은의 미묘한 표정과 유려한 제스처에 의해 탁월하게 표현된다. 말하자면 이석의 어른 인영에 대한 감정은 원인 추론이 가능하고 인영의 소년 이석에 대한 감정은 그 효과로 짐작할 수 있다. 남자친구 정우가 슬쩍 말하는 것이지만 김정은이 연행하는 인영의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보통 남자들의 감정적 소유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다른 장치들이 그렇듯 <사랑니>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

관계라는 배열 속에서 변화무쌍한 특이성과 신비함을 갖는 사랑을 <사랑니>는 치아의 배열, 즉 치열에서 가장 늦되게 발달하는 사랑니에 빗대고 함수 속으로 밀어넣어 재배열시킨다. 누가 보든 이 기획은 사랑의 본질 운운하는 본질론이라기보다는 가히 구조주의적일 것이다. 아! 그러니 사랑니, 지혜를 가져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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