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영화 <타짜> 첫패 까다
2005-10-20
사진 : 김태형 (한겨레 기자)
정리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정리 : 임인택
판벌린 원작 허영만 - 감독 최동훈

허영만의 만화 <타짜>는 재밌다. 본 사람은 안다. ‘재밌다’ 앞에 ‘정말’, ‘너무’, ‘무지’ 등의 부사를 붙이지 않기가 힘들 거다. 이걸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하면서 240만명 관객을 끌어모은 최동훈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다. 허씨는 47년생, 최씨는 71년생, 24살 띠동갑이다. 데뷔 전부터 허씨의 <각시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허씨의 팬인 최씨는 지난 8개월 동안 혼자서 <타짜> 1부를 오리고 두드리고 붙이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대담이 진행된 9일 아침 시나리오 3고를 완성한 그는 대담 장소인 한겨레신문사에 와서 막 프린터로 뽑은, 프린터 열기도 안빠진 따끈따끈한 에이포(A4)용지 80장을 허씨에게 건넸다. 30년 이상 1000권이 넘는 만화를 그려온 중견 작가에게 영화화는 새삼스런 일도 아니건만, 감독 손을 빠져나온 시나리오를 처음으로 받아 쥔 그의 얼굴이 흐뭇하면서도 사뭇 설레 보였다. 두 사람은 만화 <타짜>와 노름꾼, 만화와 영화를 오가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허영만=궁금하네. 어떻게 썼을까.

최동훈=시나리오는 원작이랑 많이 달라요. 사실 이야기 자체는 2,3부가 더 흥미롭잖아요. 복수극이니까 드라마도 더 세고. 그에 비하면 1부는 좀 더 떠돌이 이야기같고 인간적인 느낌이 강해요. 그래서 각색하기가 힘들었죠.

허영만=당연히 달라야지. 내 만화를 영화화하겠다는 사람들이 써놓은 시나리오 보면 장면만 나누고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게 대부분이예요. 그럼 나도 답답하죠. 도대체 영화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원작자로서도 같은 작품이 다른 장르로 만들어질 때 또 다른 능력을 보고 싶거든요.

최동훈=선생님 작품들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많이 만들어졌죠. 저는 오래전부터 <각시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100억원짜리 프로젝트라…(웃음). 만화라는 게 단순하면서도 고유의 판타지가 있는 건데 선생님 작품은 이야기가 시쳇말로 ‘만화’같지 않고 믿어진다는 특징이 있는 것같아요. 장르적 색채도 있으면서 리얼리티가 뛰어나고, 그런 점에서 영화로 옮기기도 좋은 것같구요.

허영만=그런 질문 많이 받지. 왜 당신 만화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것같냐. 같은 만화지만 뻥이 좀 덜 세요(웃음). 뛰어난 수퍼맨들도 별로 등장하지 않고, 그러니까 영상으로 바로 다가올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최동훈=맞아요. 이야기 자체가 현실감이 있고, 저는 <타짜>가 칼을 들지 않은 사무라이들의 대결이라고 할까? 그런 대결구도를 영화로 옮겨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무협영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화투도 어차피 둘이 맞붙어 싸우는 거잖아요. 그런 점이 끌렸죠. 그런데 7권 분량의 길고 오랜 주인공의 행적을 어떻게 압축시켜야 그의 승부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가 각색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다른 장르로 각색된 작품들은 만족스러우셨나요?

허영만=그렇지는 않아요. 한참 전에 뭔 영화의 러시필름을 봤는데 미치겠더라구(웃음). 근데 감독, 제작자, 스태프 다 있는 자리니까 무슨 이야기를 못하겠는 거야. 사실 <망치>(애니메이션)도 보면서 슬쩍 중간에 나와버렸는데, 망치는 내가 제일 예뻐하는 캐릭터거든. 그 힘 좀 쓸 것같은 개구쟁이를 얌전한 모범생으로 만들어놨더라구. 특별히 제작자를 탓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우리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보는 것같아서 안타까웠지.

최동훈=영화는 만화나 소설같은 원작을 많이 빌어오는데 각색하면서 원작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근데 고쳐 쓸수록 내용 자체는 원작과 점점 멀어지죠. 초고 딱 썼을 때는 원작과 거의 비슷해요.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재미있다고는 하는데 제가 한 건 거의 없는 거죠. 두번째 버전부터 새로운 걸 넣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헤매는 거예요. 원작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조합도 잘 안되고, 어쨌든 그런 식으로 원작과 다른 질서를 잡는 게 끝나면 거기서부터 다시 고칠 희망이 생기고 그러면서 원작과 점점 멀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 모든 작업이 끝나면 결국 원작의 테두리 안에 있을 거예요.

허영만=영화로 만든 내 만화 중에 <비트>가 제일 잘 다듬어진 것 같아. <타짜>가 본래 다른 영화사에서 준비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는 걸 보다가 내가 직접 차승재 대표를 찾아가 영화화 이야기를 꺼낸 것도 <비트>(차승재 싸이더스에프엔에이치 대표가 이 회사 전신인 우노필름 때 제작)를 보고 얻은 신뢰 때문이었어요.

최동훈=저는 <범죄의 재구성> 개봉 끝난 직후 다른 영화사에서 <타짜> 연출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처음 책으로 나왔을 때 무지 재미있게 읽었는데, 꼭 천일야화식으로 진행되는 로드무비같기도 하고, 근데 에피소드나 등장인물 수가 너무 방대해서 영화로 옮길 엄두가 안났죠. 그러다가 지난 겨울에 다시 제안을 받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어요. 주인공을 죽이겠다. <스카페이스>나 <칼리토>처럼 성공의 정점에 오르는 순간 비참하게 몰락하는 그런 사람이야기로. 그런데 쓰면서는 고민을 많이 했죠. 하루에도 열두번씩 주인공을 살렸다, 죽였다 하면서(웃음).

허영만=나도 <범죄의 재구성>을 개봉했을 때 봤어요. 최 감독을 모를 때였는데 사람을 먼저 알고 봤으면 또 다르게 보였을 거야.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최동훈=<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약간의 공통점도 있어요. 착하지 않은 사람들 이야기라는 점에서. 물론 도박꾼과 사기꾼은 좀 다른데, 사기도박도 있지만 제 생각에 일반적으로 사기보다 도박이 훨씬 더 본연적인 욕망에 가까운 것같아요. 모두 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빠지는 수렁이나 늪 같은 거죠.

허영만=나는 도박에 빠져 드는 수순을 밟는 사람이 운명적으로 혹은 유전자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봐요. 보통 세 사람이 모이면 요거(화투치는 동작)하지만 우리집은 이거(술잔 꺾는 동작)하거든. 그러니까 노름하는 사람이 없지. <타짜>는 모델이 따로 있었지. 한 출판사 대표한테 소개를 받았는데 지리산 끝자락 함양에 한탕하고 은퇴한 노름꾼과 그 노름꾼 소개로 또 다른 꾼을 만났어요. 그 사람은 폭탄으로 고기를 잡다가 손가락이 날라가는 바람에 은퇴했던 인물인데 두 사람 이야기를 뼈대로 글 쓴 김세영씨가 살을 붙였지.

최동훈=<범죄의 재구성> 때 차 대표가 전화를 했어요. 친구 하나가 출옥을 해서(웃음) 술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가니까 포커를 치는데, ‘하이로’, ‘두꺼비’ 등 계속 종목을 바꿔가면서 하는 걸 저는 전혀 못 따라가겠더라구요. 그래서 한시간만에 ‘뻘줌’하게 나왔죠(웃음).

허영만=차 대표도 도박 좋아할 것같애. 내 보기에 차 대표는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도박을 하지 않았을까?(웃음). 자질적으로 승부사 기질이 강한 것같고, 또 영화라는 사업 자체가 그런 성격이 있잖아요. 배팅하는 거. 우리같이 소심한 사람은 절대로 못하지. 도박을 하려면 일단 머리가 좋아야 하거든. 몇판 돌다보면 저쪽에서 뭐 들고 있는지 대충 알아야 하니까. 두뇌를 포함해서 다 운명적인 거니까 그 세계에 잠깐 발 들이면 푹 빠져들고 못나오는 거지. 보통 사람은 돈 따면 미안하고 잃으면 성질나니까 거기에 몰두할 수가 없어요.

최동훈=저는 <타짜> 시나리오를 쓸 때 친구들 불러서 고스톱을 몇번 쳤어요. 얘들아 취재해야 하니까 빨리 잔돈 바꿔가지고 와라(웃음). 제가 시골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치긴 했는데 고스톱은 잘 해요. 그런데 ‘섯다’나 포커 이런 거는 맨날 지더라구요.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라.

허영만=재미있는 건 그 사람들(타짜)도 고민인 게 돈만 따면 경마장으로 달려가는 거야. 그래서 자기는 경마를 끊어야 되겠다는 거야. 많지도 않은 돈 벌어서 경마장에 갖다 바치니까. 노름 끊겠다는 이야기는 안하고 경마 끊겠다는 이야기만 해.

최동훈=저는 영화에서 노름꾼이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해요. 뒷골목을 배회하는 인간들로 생각되지만 화투를 안 칠 때는 도시의 대로를 걷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좀 웃긴 이야기를 하자면 <타짜>처럼 재미있고 반응도 폭발적이었던 원작을 던져주면 부담이 엄청 커요. <타짜> 독자들이 팔짱 딱 끼고 그래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자 이러지 않겠어요?(웃음)

허영만=나야 최감독을 믿지. <타짜> 4부 영화화 제안이 서너곳에서 왔어요. 근데 내 생각에 이건 말이 아니다, 뭐가 급해? 1부가 걸려 있는데. 4부까지 안 만들어져도 좋으니까 이번 작품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비트>도 잘되니까 2부 제안이 왔었는데 좋을 때 그만 하는 게 좋아. <타짜>도 4부 연재 끝나니까 5부 시작하자고 하더라고. 이것도 그랬어. 내 나이가 몇인데 맨날 요런 것만(화투장 들고 있는 동작) 그리고 있으려니까 ‘쪽팔려서’ 죽겠다(웃음). 5년 그렸으면 충분하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 접은 거지.

최동훈=그럼 이제 도박만화는 마무리하신 겁니까?

허영만=그렇진 않아요. <타짜>에 빠진 부분도 있어보이고, 다시 해보고 싶어요. 그 판이 의리나 인간미 따지며 들어가는 곳이 아니잖아. 오직 상대편 죽이려고, 저놈이 가진 것 빼앗으려고 들어가는 판이지. 그래서 처절하게 나쁜 놈, 심하게 이야기하면 자기 엄마도 강간할 것같은 악랄한 놈을 등장시켜서 한번 그려보고 싶어요. 독자들이 세상이 이런 놈이 있나 할 정도로 이기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기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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