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각시탈>∼<타짜> 허영만의 만화인생 31년
2005-10-20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글 : 임인택
“어린이엔 꿈-어른엔 위안을 주다”

31년 만화인생.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 하나쯤은 거들 수 있을 만큼 그는 장수 인기작가이다. 30년 전에 발표한 <각시탈>에서 오늘의 <타짜> <식객>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성업 중인 허영만. 그는 한국현대만화의 작은 역사이자 한 정점이다.

침침한 만화방 구석에서 침 묻히고 있던 어린 독자들에게 일제의 앞잡이들을 무찌르던 <각시탈>의 뛰어난 권법은 한마디로 환상이었다. 기절초풍할 만한 권법으로 동네깡패를 패주고 예쁜 여학생과 사귀는 공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독자들의 환호에 30권이 넘는 시리즈로 나왔던 <각시탈>은 허영만의 작품 철학인 “만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의 시작이었다. 이 어린 독자들이 20대가 됐을 무렵인 80년대 중반, <무당거미> <카멜레온의 시>에서 주인공 ‘이강토’는 좀 더 비장해졌다. <무당거미>에서 복수를 위해 25kg이나 감량하고 복싱에 나선 이강토는 매 경기마다 체중조절로 끝없이 고통 받으며 승리를 갈구하고, <카멜레온의 시>에서 강토는 가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인 ‘장미’와 몰아닥친 불행의 칼날에 점차 극단으로 몰려간다. 어른 독자들은 절망과 비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오, 한강>은 이 시기 가장 빛났던 걸작이다.

‘변화’는 허영만의 또 다른 명제였다. 1994년 발표된 <비트>는 허영만의 오랜 팬들을 놀라게 했다. 허영만의 만화라고 하기엔 전혀 달라보이던 그림들, 변화는 불안을 동반했지만 허영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날렵한 뉴 페이스의 반항아 ‘이민’과 속도감 있는 연출로 사회에 막 발 딛으려는 세대들의 아픈 성장과정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날아라 슈퍼보드> <망치>로 어린 독자들 곁으로 다시금 찾아갔고, 일일 서정시 같았던 <사랑해>를 툭 내놓기도 했다.

이용철/부천만화정보센터 학예팀장

허영만의 방대한 만화세계는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감독들이 오래전부터 눈독 들여올 정도로 중요한 원천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만도 <비트>(1997년)를 비롯해 <48+1> <미스터 Q> <아스팔트 사나이> 등의 작품이 재탄생되며 큰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만화와 영화의 만남에는 남 다른 친밀감이 있다. 만화의 영화적 상상력을 북돋아주고,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을 축으로 하는 스토리 구조는 영화 시나리오에 버금간다.

허영만의 2000년대 대작 <타짜>는 만화의 영화화에 큰 기대를 걸게 하는 기대주이다. 1부 ‘지리산 작두’에서 4부 ‘벨제붑의 노래’까지 4년 동안 연재되며 열독과 아우성을 몰고 온 <타짜>는 인간의 욕망을 정면으로 그린 대작이다. 인생은 한번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억누르고 침묵하는 우리들에게, 사실 ‘노름’쯤 해도 괜찮은 거 아니냐며, 손가락이 좀 잘려도, 가난한 누나의 전 재산을 하룻밤에 날려 죽을 것 같이 미안해도, 사실은 괜찮다며 만화는 우리 인생을 다독거려 준다. 아니 모범생 흉내는 그만 내고 복수는 두 배로 해야 한다며 우리에게 충고한다. 인생은 사실 야수들이 득실대는 밀림 아닌가. 허영만과 스토리 작가 김세영이 일구어낸 이 최고의 작품은 전체 41권을 삼일 밤 꼬박 새워 읽게한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만화-영화’ 가까이, 더 가까이

<슈퍼맨>에서 <스파이더맨>까지 만화는 늘 새로운 이야기거리를 찾는 할리우드에서 물 좋은 수원지 역할을 했다. 원작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아니라 <매트릭스>처럼 표현양식에서 적극적으로 만화가 차용되면서 ‘만화적인’이라는 표현이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올해 개봉한 <씬 시티>에 이르면 아예 영화 자체가 스크린에 옮겨진 만화로 바뀌어버릴 정도로 만화와 영화는 가까워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보석창고, 코믹스=1941년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최초의 실사영화 <캡틴 마블의 모험>이 등장한 이후 코믹스(이야기 만화)는 50년대부터 영화로 꾸준히 만들어져왔다. 주로 초인적 능력을 가진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코믹스 중 영화로 성공한 첫작품은 <슈퍼맨>(1978)으로 개봉 당시 1억3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코믹스 업계의 침체와 애국주의적 영웅에 대한 대중의 식상함으로 별 재미를 못보던 만화의 영화화는 1988년 팀 버튼 감독이 만든 <배트맨>에서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영웅담이지만 슈퍼맨과 달리 어두운 반영웅적 풍모를 풍기는 <배트맨>은 극장 수익만 2억5천만 달러 이상 거뒀고 갖가지 컴플렉스를 가진 변종 영웅의 도래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런 ‘심난한 영웅’들의 인기는 2000년대 들어 <블레이드> <엑스맨> <헐크> <스파이더맨> 등의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다. 특히 스스로 ‘쫄쫄이 스타킹’을 빨아입어야 하는 신세의 영웅 <스파이더맨> 1, 2편은 역대 흥행순위 6위와 9위에 올랐다. 이밖에 <스폰> <헬보이> <씬 시티>등이 영웅이 사라진 시대의 ‘마이너리티’ 영웅을 등장시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또한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슈퍼맨> 1편의 리처드 도너 감독을 제작자로 끌어들여 슈퍼맨의 부활을 꿈꾸는 <슈퍼맨 리턴즈>가 제작중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비트>까지=충무로가 본격적으로 만화와 악수한 건 이현세 원작, 이장호 감독의 <공포의 외인구단>(1986)에서다. 제목의 ‘공포’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제목이 바뀌어 개봉됐던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주제가도 큰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이현세의 <지옥의 링>, 박봉성의 <신의 아들>,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이 당대 대표 만화가의 작품들이 줄줄이 영화로 제작됐으나 졸속 제작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후 잦아든 만화의 영화화는 허영만 원작,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방황하는 10대의 풍경을 그렸지만 연소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10대 관객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비트>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영화로 손꼽힌다.

충무로 만화 전성시대 열리나=2000년대 들어 충무로는 본격적으로 만화계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혜린 원작의 판타지 시대극 <비천무>가 김희선 주연으로 만들어졌으며, 2003년 문화방송에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돼 ‘다모폐인’을 만들었던 방학기의 <다모>가 이명세 감독의 영화 <형사:듀얼리스트>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또 같은 작가의 원작인 <바람의 파이터>가 비교적 좋은 흥행성적을 냈다. 특히 올해 들어 만화의 영화화 작업이 두드러진다. 인터넷에 연재됐던 엽기만화 <다세포 소녀>가 이재용 감독의 연출로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으며 <순정만화>로 인터넷 최고 인기 만화가가 된 강풀(강도영)의 작품은 <순정만화>를 비롯해 <아파트> <바보> <타이밍>등 무려 4작품이 동시에 제작 준비중이다. 허영만 원작의 <식객>도 드라마화와 영화화가 함께 추진되고 있다.

산골청년이 ‘타짜’ 로 우뚝서다

지리산 자락에서 나무를 해 내다 팔던 곤이 자전거 한 대를 사고 싶었다. 계산해보니, 20리 길을 100차례는 족히 오가며 나뭇짐을 해 날라야 했다. 그 길로 화투판을 찾아가 자전거 세대 값인 5만환(원)을 땄다가 동트기 전 다 잃어버리는 곤. 한번도 만져본 적 없던 5만환의 기억은 그를 다시금 화투판으로 불러들이고, 누나가 어렵게 장사밑천으로 마련해둔 50만환을 하룻밤 새 다 날려버린다. 도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숙명이 된다.

경찰 출신의 스승 평경장(평은수)을 만나 허드렛일부터 하며 도박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된 수행에 들어간다. 엉덩이 겨우 비빌 작은 화투판은 모략, 배반, 신의, 애욕, 갈등 등으로 가득한 ‘삶’의 축소판이다. 빨치산과 국군이 밤낮으로 번갈아 마을을 점했던 6.25 전쟁 끝자락, 열 네 살의 곤은 단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곤이 1960~70년대 최고의 ‘타짜’(도박 기술자)로 우뚝 서자 마자 도박을 끊는 것으로 <타짜> 1부(모두 7권·도서출판 채널·2000년부터)는 갈무리된다. 전체 4부 원작 가운데 영화도 거기까지만. 타짜들의 드문 ‘해피엔드’가 영화의 결말이 될지도 모른다.(시나리오 3고까지는 ‘해피엔드’이다)인 셈이다. 다만 시대를 1990년대 중반으로 옮겨 놓는다.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구라(화투의 속임수)’같은 시대다. 스승 평경장, 판을 엮어주는 전주 노릇을 하는 정 마담, 자신과 달리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동료 타짜 고광렬 등이 주인공이 되어 화투길 따라 전국을 떠도는 일면 버디 무비로 영화는 다시 태어날 참이다.

글: 이용철/부천만화정보센터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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