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싱글녀들의 발랄친구 어두운 살인마로 돌아오다
2005-10-20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사진 : 강재훈 (한겨레 기자)
<오로라공주>의 엄정화

그 여자는 곁에 두고 싶은 친구같았다. 우울하고 칙칙했던 자리가 그가 오면 확 밝게 변하고, 밤새도록 미운 직장동료 험담을 신나게 나눌 수 있으며, 내가 망설이고 주춤했던 욕망들을 솔직하고 후련하게 드러내는, 그러다가 깨지더라도 “뭐, 어때?”라면서 내 마음까지 위로해주는 그런 친구.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이, <싱글즈>의 동미, 최근 개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유정까지 배우 엄정화(36)는 고단한 ‘싱글녀’들에게 박하사탕처럼 상큼한 친구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랬던 그녀’가 어두운 그늘을 눈 아래 드리운 연쇄살인범으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지금도 생기 발랄한 유정이 스크린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얼음처럼 차가운 <오로라 공주>의 순정을 맞이하려니 조금 헷갈린다.

“<오로라 공주>는 본래 제꺼가 아니었어요. 사실 저한테 올만한 시나리오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 하고 싶었죠. ” 통통 튀고 조금은 여우같은 ‘전공’ 역할에서 벗어난 드라마 <아내> 대본이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난다, 홍반장> 시나리오가 왔을 때 앞뒤 안가리고 냉큼 ‘오케이’를 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부산하게 움직여 그는 ‘정순정’역할을 따냈다. 처음에는 다른 배우를 염두에 뒀던 방은진 감독도 엄정화의 열성에 마음이 움직여 캐릭터를 수정했다. 그렇게 정순정은 순박한 시골여자에서 생활력 강한 도시여자로 거듭났다. 연쇄살인범이란 엄정화가 그동안 연기했던 배역들과 한참 떨어져 보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스스로 풀어가는 인물’ 이라는 점에서 정순정은 연이나 동미가 친연성을 느낄만한 인물이다.

“방 감독님이 배우 출신이니까 처음에는 많이 신경 쓰였어요. 리딩할 때 감독님이 “그걸 어떻게 그렇게 길게 읽어?” 핀잔을 주면 “그럼 안되나요?” 궁시렁거리기도 하고. 감독님의 연기를 따라하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감정연기를 할 때는 다른 감독보다 더 배우를 풀어놓는 거예요. 오히려 그게 더 힘들고 저한테는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영화 초반 정순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다섯 인물들을 차례로 잔인하게 죽여나간다. 찌르고 묶고 패는 앞부분이 ‘육체 노동’에 가까웠다면 다섯 피해자들이 죽음을 맞게 된 사연을 밝혀내는 뒷부분 연기는 감정의 중노동이었다.

“클라이맥스인 쓰레기장 장면에서 감독님은 ‘(감정을) 눌러, 눌러’ 계속 신호를 보내는네 크레인 올라갈 때 이미 터지기 시작한 눈물이 절대 멈추지 않는 거예요. 결국 감독님이 포기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쉽기도 하고.” 개봉은 <내 생애...>가 먼저 했지만 촬영 순서는 <오로라 공주>가 빨랐다. 이 작품에서 소진되고 가라앉은 감정을 ‘물 만난 고기’처럼 <내 생애...>의 허유정을 연기하며 북돋웠을 거라 예측했는데 전혀 아니다. “저도 <내 생애...>를 찍으면서 마음이 풀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힘들었어요. 너무 어색하고 촬영을 즐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인가 고민도 많이 했는데 황정민씨와 민규동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아직도 좀 우울해요.”

여동생과 둘이 사는 집에 가끔 동생 엄태웅이 놀러와 함께 술을 마신다. 연기자 후배인 동생에게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고 당부하지만 정작 조급한 건 그다. <오로라 공주> 무대 인사를 끝마칠 즈음에 새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물론 연기 환경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나이와 역할 선택 폭을 생각하면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많은 역할을 연기하고 싶어요.” <오로라 공주>는 2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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