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는 두렵다고 했다. 데뷔한 지 10년이 훨씬 넘었고, 가수로 이미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TV와 영화에서 실패한 적이 없는 그녀가, <오로라공주>의 개봉을 앞두고는 두렵다고 말했다. 먼저 개봉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이상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하는 이런 상황에서 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은 아니었다. <오로라공주>가 지금까지 했던 배역과 전혀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으면 으레 하는 말로 흘려들을 법한 소리다.
<오로라공주>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정순정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충격적인 첫 번째 살인, 곧 이은 다음, 또 다음 살인사건들. 연쇄살인의 이유를 찾는,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살인자 정순정을 연기한 엄정화의 어깨는 당연히 무거웠을 것이다. 친한 사이인 <오로라공주>의 음악감독 정재형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를 뺏어 읽은 뒤, 엄정화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순정 역할을 따냈다는 사실은 부담감을 줄여주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엄정화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가장 큰 두려움과 떨림은 무엇보다도, 까불까불했던 그간의 이미지에 갇혀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엄정화는 시골에서 딸 셋, 아들 하나 있는 집의 둘째딸로 자랐고,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서 특별한 ‘끼’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공부에서도 예체능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기억은 없다. 다만 노래는 계속 했다. 마침내 <눈동자>로 데뷔했을 때 가장 기분 좋았던 칭찬은 ‘차가워 보인다’는 말이었다. 쿨한 도회적 이미지로 팔려 왔지만 사실 엄정화는 시골 소녀였다. 계절이 주는 냄새에 민감하고, 비가 오는 날은 살짝 비릿한 동시에 먼지 내음이 나는 대기의 냄새로 먼저 알아채는. <오로라공주>의 정순정을 연기하기 위해 자기 안에서 끌어내야 했던 것도 그런 엄정화였다. TV다큐를 보면서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순정이라는 인물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진짜 감정’뿐이었다. “금슬 좋은 부부들은요, 둘 중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한 사람도 곧 죽는대요. 마음이 아파서. 그런 얘기를 보면 마음이 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마치 주변 사람의 실화를 들려주듯 속삭이는 엄정화는 아직도, 정순정이라는 여자를 자기 안에서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때도 <싱글즈> 때도 겪지 못했던 일인데 이번 역할에서는 빠져나오는 게 너무 힘드네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충무로에는 여자감독이 드물다. 배우 출신의 감독은 더욱 드물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방은진 감독과 일하는 것은 어땠을까. “글쎄요, 여자감독님이라고 특별히 다른 게 있었나? 없었어요. 화장실을 같이 가는 것? 같이 누워서 대본 연습할 수 있다는 것? 사실 그런 게 제일 좋았어요. 남자배우들이 (남자) 감독님들하고 편하게 붙어다니는 게 사실 좀 부러웠거든요.” <오로라공주> 이전, 제목이 <나는야 오로라공주> <그녀의 적>이었던 예전 버전의 시나리오를 읽었기 때문에 정순정에게 깊이 감정이입을 한 엄정화와 절제를 요구하는 방은진 감독 사이의 논쟁은 녹록지 않은 동지애로 발전했을 법하다. <오로라공주> 속 자신의 연기에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면서도 엄정화가 원하는 건 사람들이 “<오로라공주>라는 영화에 빠져드는 것”이다. “순정이라는 인물에 빠져 있었다는 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보시는 분들이 순정을 이해한다면,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주신다면 그게 가장 큰 칭찬 아닐까요?”
무엇이 없으면 살 수 없을까요, 라는 질문에 “친구가 없으면 못 살지 않을까… 가족도 그렇죠. 그리고 술? (웃음) 그리고… 사랑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수로서, 배우로서, 섹스어필을 무기로 삼았던 엄정화가 (군인을 포함한 남자뿐 아니라) 같은 여자에게도 ‘멋지고 재밌는 언니’로 비칠 수 있었던 건 이런 다감함이 은연중에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있거나 할 때는 돌아가신 아빠한테 혼잣말로 막 얘기해요. 종교는 없지만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하거든요. 그렇다고 아빠한테 기도를 하는 건 아니에요. 도와준 건 이모인데 아빠한테 기도해서 이모가 화나면 어쩌지? 안 그런가?” (웃음)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 있느냐는 물음에 “하나도 없어요!”라고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던 엄정화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친구들이랑 이런 얘길 했어요. ‘너 다시 22살 때로 돌아가고 싶어?’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아니 그 상태 그대로!’ 다들 싫다고 하더라고요. 서른이 넘으니까 이제야 한숨 돌리고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잠시 깍쟁이 같은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오라, 두려움도 떨림도. 이제 보니 인기와 욕망의 외줄타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알아버린 엄정화에게 두려움은 친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