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등의 연이은 실패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된 RKO는 저예산 B급 공포영화라는, 다소 엉뚱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난국을 해결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성과는 이뤘지만 몰락하는 스튜디오를 파산에서 건져내지 못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게 된다. RKO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금 그가 남긴 공포영화들은 역설적으로 오손 웰즈의 영화와 함께 RKO의 가장 빛나는 영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마지막 도박을 총지휘한 사람은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어시스턴트였던 발 루튼이란 무명의 인물이었다. 루튼은 감독 자크 뚜르네와 1942년에 발표한 <캣 피플>을 통해 기존의 유니버설 영화사의 공포물과 대비되는 새로운 유형의 공포영화를 창조해낸다. 공포의 근원이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와 같은 괴물이 아닌 인간 내부에 잠재된 감정과 억압된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심리학적 접근 방법으로 공포의 영역을 심리적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심리적 공포감은 당시 유행하던 느와르적 촬영 기법과 결합하여 편집증적 공포를 표현하는 특유의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촬영술의 전통에서 발현되었다. <캣 피플>의 성공 이후 루튼은 뚜르네 외에도 웰즈 영화에 참여한 편집 기사였던 마크 롭슨과 로버트 와이즈 등을 감독에 데뷔시킴과 동시에 <드라큘라>의 배우 벨라 루고시 등을 끌어들여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캣 피플의 저주> <유령선> <죽은 자의 섬> 등 총 9편의 공포 명작을 1946년까지 RKO에서 제작하게 된다.
루튼의 공포영화들은 판권 소재의 모호함 때문인지 DVD 출시가 연기되어 왔다. 뚜르네의 작품들만 고국 프랑스에서 출시된 바 있는데, 이번에 미국 워너에서 루튼이 4년 동안 RKO에서 제작한 공포영화 전작을 하나로 묶은 박스세트로 출시하였다. 아쉽게도 화질은 워너의 다른 고전에 비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며, <캣 피플>의 경우 2년 전 발매된 프랑스판보다 오히려 못한 화질을 보여준다. 하지만 <엑소시스트>의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참여한 음성해설이 일부 작품에 수록되어 있으며, 루튼의 일대기 <어둠 속의 그림자>가 특별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루튼의 생애에 대한 좋은 다큐멘터리로서, RKO 스튜디오의 우울한 역사와 루튼의 영화 역정, 그리고 루튼의 지도 아래 뚜르네나 롭슨, 와이즈와 같은 다재다능한 감독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유형의 공포물이 후대 공포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공포영화의 팬들에겐 장르 계보의 빈칸을 채워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