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독일 개봉 당시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성공을 거둔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영화는 2차대전의 막바지에 이른 1943년 2월, 독일 내 반정부 단체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소피 숄의 마지막을 세심하게 재연했다. 극장용 드라마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은 1968년생.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그는 뮌헨대학에서 반나치 리플릿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연한 최후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가 궁금했고, 관객이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웅으로 죽어간 평범한 소녀의 용기를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그 어떤 정치사상과 논리를 익히는 것보다 큰 힘을 지닌다고 믿었던 탓이다. 지난 10월8일. 영화제의 열기가 한껏 달아오른 부산에서 로테문트 감독을 만났다. 영화적이고 형식적인 야심보다는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에게서, 60여년 전의 영웅담을 생생한 현실로 재현한 일련의 과정을 들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당신이, 2차대전 당시 반정부 활동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60년대에 태어난 우리는 전쟁에 대한 죄책감은 없지만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기록을 조사하면서 소피 숄의 여동생, 나치 장교의 아들, 백장미단의 다른 생존자 등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다녔다. 대부분은 현재 80, 90대에 이른 이들로 우리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이 밖에도 소피 숄과 다른 멤버들의 재판기록이며 처형기록 등 모든 시시콜콜한 자료들을 다 살폈고 이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피 숄이 사형장에 들어서서 죽기까지의 시간, 8초도 지키려 했다. 영화 속 5일간의 실제 날씨를 알아내기 위해 수백달러를 썼다. 대부분의 대사는 실제로 소피 숄와 주변들이 했다고 기록된 말들이다.
-소피 숄은 리플릿을 배포하러 집을 나서면서 머리에 핀을 꽂는다. 그리고 나치 장교 앞에서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직후 화장실에 가서는 그 핀을 다시 뺀다. 그런 디테일이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 효과를 의도했나.
=실제 사진 속의 소피 숄은 머리핀을 꽂고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첫 부분에서 숄 남매가 대학에 갈 때, 그들은 매우 평범하고 순진한 학생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범행을 시인한 뒤 화장실을 찾은 소피 숄은 죽음을 예감하고 잠시 동안 눈물을 흘리지만, 이내 앞으로의 목표가 스무명 남짓한 백장미단의 남은 동료들을 살리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뒤로 그녀는 모든 범행은 오빠와 둘이서 계획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소피 숄은, 이제는 순진무구한 학생으로 보이기보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진행할 만큼 성숙하고 강인해 보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피 숄이 머리핀을 빼는 순간은 영화 속에서 일종의 분기점이다.
-영화 속에서 소피 숄의 심문 장면이 반복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밀폐된 공간에서 3일을 보낸 두 사람, 21살의 여학생과 그 아버지뻘 되는 나치 장교가 조금씩 변해가는 심리적 여정을 담으려 했다. 영화 속 심문장면 대사의 90% 이상은 모두 실제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그녀가 처음부터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인 소피 숄은 첫날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3일이 지난 뒤, 장교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어하지만, 한결 단호해진 소피 숄은 “또다시 그런 상황을 맞닥뜨려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며, 잘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한다. 전혀 다른 두명의 캐릭터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감정의 여정이 나를 매혹시켰다.
-촬영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5분 동안 계속해서 카메라를 돌리기도 했다. 카메라 두대로 클로즈업과 미디엄숏을 한번에 찍었다. 배우들은 15페이지에 달하는 대사를 외워야 했다. 오랫동안 연기를 이어가다보면, 배우 자신도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잊고, 완전히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두대의 카메라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찍는 게 낫지 않았을까.
=촬영감독은 나에게 항상 한 방향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프레임을 확인할 때 빼고는 모니터를 보지 않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가면 언제나 카메라 바로 옆에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려 애쓴다.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관객도 믿을 수 없다.
-처형을 앞둔 가족들의 의연한 작별장면도 실제 상황인가.
=1970년대에 돌아가신 소피 숄의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백장미단에 속했던 젊은이들이 독일을 뜨겠다고 했을 때, 그는 “여기가 바로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고, 여기서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 딸의 마지막에 대해 기록을 남겼고, 영화 속 가족들의 대화장면의 대사 대부분은 그 기록 그대로다. 부모와 작별한 소피 숄이 자신을 심문한 장교에, “방금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겁니다”라고 했던 말은 그 장교 자신이 증언했다.
-이별 장면에서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놀랍다.
=실제 그 순간에 아무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들에겐 눈물을 글썽거리는 건 상관없지만 우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이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강렬함을 자아냈다. 영화를 보면 소피 숄이 뒤로 돌아 방을 나서는 바로 순간, 눈물이 흐른다. 율리아 옌치가 그 타이밍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했다.
-소피 숄의 처형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기 직전 화면이 암전되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나.
=그렇다. 영화의 마지막은 소피 숄의 눈동자였으면 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관객을 응시하고 관객은 그녀의 마지막 눈빛을 바라봐야 했다.
-<소피 숄…> 전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나.
=이것이 나의 8번째 영화다. 다섯편은 TV영화, 세편은 극장용이다. 앞서 만든 두편의 극장영화는 모두 코미디였다. 자국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 독일 관객은, 극장에서는 코미디영화를, TV에선 드라마가 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그중 한편인 <팬티 속의 개미>는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오. 그런가. 그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내가 15살 때 성에 눈뜬 경험 말이다.
-두편의 영화가 전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느껴진다.
=인생에도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존재하지 않나. 세편의 극장영화 중 한편은 코미디와 드라마가 섞여 있는 작품이다. 앞으로는 드라마와 코미디뿐 아니라 액션과 스릴러 등 다양한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 계획은.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유와 용기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당분간은 영화를 들고 전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소피 숄…>은 독일영화를 대표해서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제출되어 있고, 내년 2월쯤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그때를 즈음하여 미국을 방문하고 여행을 마치면, 내년 여름부터 코미디영화를 촬영할 것이다. 지난 3년은 온전히 <소피 숄…>과 함께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