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비루한 것들의 축제, <과거가 없는 남자>
2005-11-02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집대성 <과거가 없는 남자>

핀란드 출신의 아끼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의 <과거가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A Past)>는 2002년에 <취화선>과 칸 영화제에서 경쟁(이때 <과거가 없는 남자>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였다)한 작품이었으니 3년을 지각한 셈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그 제목과 반대로 카우리스마키의 과거 영화들이 가장 적절하게 집약된 작품이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코믹적 요소가 무엇보다 돋보이고, 여기에 판타지적 분위기를 이끄는 뮤지컬적 요소, 냉혹하고 비천한 현실에 바탕을 둔 캐릭터와 배우들의 무표정한 연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냉소와 하층 계급의 유대에 바탕을 둔 공동체에 대한 믿음 등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이 작품은 ‘카우리스마키표 종합선물세트’라 해도 충분하다.

미이라의 부활

영화는 기차에서 내린 한 남자(마르쿠 펠톨라)가 깡패들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병원에 실려가지만 살아날 확률은 없다. 그런데 순간 기적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사망 선고를 내리고 의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죽은 줄만 알았던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이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휘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더니 비뚤어진 코를 홱 돌려 바로잡고는 병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살아난 것은 남자의 육체일 뿐이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성장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이 단지 과거의 집적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로 범람하면서 ‘지금의 나’를 규정해주는 정체성의 근간이라면, 기억이라는 존재의 뿌리를 상실한 채로 헬싱키의 허름한 마을에 도착한 ‘과거가 없는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세상에 던져진 존재와 다르지 않다. 카우리스마키는 과거를 잃어버린 이 남자처럼, 황량한 현실에서 자신의 뿌리를 상실해버린 이방인으로서 현대인이 어떻게 정신적으로 부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남자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마치 미이라의 부활처럼 표현한 것 역시도 <과거가 없는 남자>가 ‘정신적 부활’에 대한 우화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웃음 속의 슬픔, 슬픔 속의 웃음이 공명하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보여지는 ‘이방인’의 캐릭터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이 세작품이 맞는지 확인!!)인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의 인물들 역시 자신이 거주하는 환경과 조화되지 못하는 ‘심리적 이방인’들이었다. <천국의 그림자>와 <아리엘>이 조화될 수 없는 환경에서 탈피하여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을 제시했다면, 브레송의 <무셰뜨>(1967)와 <돈>(1983)을 합쳐놓은 듯한 <성냥공장 소녀>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뒤집은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길게 보여지는 성냥 공장의 내부, 즉 세상을 밝히고 온기를 더하는 성냥을 생산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음으로 삐걱대고 비인간적인 움직임을 강요하는 공장은 현대 사회에 대한 은유였다. 동화와 달리, <성냥 공장 소녀>에서 냉혹한 세상의 탈출구를 발견하는 데 실패한 소녀는 자신과 관계된 이들을 독살함으로써 이 세상에 복수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소녀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그녀가 부재하는 공간 뒤편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작동하는 공장 기계의 모습, 즉 그녀와 공존 불가능했던 잔혹한 세상의 이미지는 너무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유하>(1999)와 함께, <성냥공장 소녀>가 가장 비극적인 세계관을 내비친 작품이라면, 카우리스마키의 이름을 국내에 알리는 데 기여했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는 낙천적인 세계관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말미에, 기억을 되찾고 전처에게 돌아갔던 남자가 다시 되돌아와 사랑하는 이르마(카티 우티넨)와 만나는 장면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맞닿는다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지 못한 임금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을 털었던 사장이 자살하는 순간을 외화면의 사운드를 통해 암시하는 장면(이는 카우리스마키의 절제된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 중 하나이다)에서는 <성냥공장 소녀>의 세계관이 묻어난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는 한 장면에 슬픔과 웃음을 동시에 공존시킬 때 빛을 발하곤 한다. 그의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이, <과거가 없는 남자>의 인물들 역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사랑에 설레이는 표정과 이별에 슬퍼하는 표정을 구분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무표정한 인물들의 얼굴에서 통통 튀는 대사가 탁구공처럼 오갈 때 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감정과 표정이, 표정과 행동이 서로 엇갈리면서 발생하는 웃음이 가장 카우리스마키다운 웃음이다.

‘인간이 기계처럼 경직되었을 때 웃음이 발생한다’는 앙리 베르그송의 지적은 카우리스마키에게도 유효하며, 그의 영화에서 채플린(특히 <모던 타임즈>)의 잔영이 느껴지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정에 담아야 할 때조차도 변함없이 경직되어 있고, 이러한 감정과 표정의 불일치가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감정은 표정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과 조금씩 반응하는 몸의 불일치가 또 하나의 웃음을 자아낸다. 고리타분한 음악만을 연주하던 구세군 악단이 신나는 로큰롤 음악이 나오자 무표정한 얼굴로 장단을 맞추는 손발의 움직임이나, 남자가 이르마에게 도둑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뒤돌아서서 자신의 뺨을 감싸는 모습,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이르마가 몰래 화장을 하는 장면은 그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과 표정의 부조화 속에서 발생하는 웃음인 것이다.

하지만 이 웃음은 곧 슬픔이기도 하다. “부유한 자가 부유한 자의 편에 서듯이, 나 자신이 낙오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낙오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말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비천한 현실 속에서 솟아난 인물들이며, 그것이 그들의 표정이 그토록 경직된 이유이다. 영화는 사람들 간의 따스한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들이 생활하는 터전의 공기는 너무도 을씨년스럽다(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화면의 색감이 이러한 분위기를 강화한다). 가슴속의 슬픔과 사랑의 설레임, 로큰롤의 경쾌함을 표정에 새기려 하는 순간, 그 차가운 공기를 호흡하다 굳어버린 얼굴이 그 감정을 담지 못하며 내비치는 어색함은 웃음 속에 슬픔을 공명시킨다.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자비로운 망각

병원에서 탈출한 남자가 도착한 헬싱키의 허름한 마을, 황량한 바람이 부식시킨 고철 덩어리가 길거리에 널부러져 삭막함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표정이 굳어버린 ‘살아 있는 시체’ 같은 무표정의 사람들은 컨테이너를 개조해 어렵사리 살아간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발견하고자 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가 새롭게 부활하는 과정을 보여줌에 있어서 정성들여 세공하는 부분은 남자가 어떠한 사람들과 조우하는가 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나와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는 이들은 컨테이너를 개조해 살고 있는 가난한 가족이다. 남자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컨테이너를 안식처로 제공하고는 단 몇푼이라도 챙겨먹으려는 관리원 같은 이(나중에 밝혀지듯이 그 역시 악인은 아니다)를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가 경험하는 마을 사람들은 주워온 쥬크박스를 수리해주거나 배고픈 그에게 빵과 우유를 대접하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무표정이 차가운 현실이 거북이 등처럼 굳어진 것이라면, 그들의 이러한 정성은 그 노곤한 현실의 벽을 뚫고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흥이 느껴진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서 밴드가 핀란드에서 불모의 땅처럼 묘사된 미국을 거쳐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음악이 빛을 발했듯이, ‘과거가 없는 남자’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롭게 기억을 채우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간다. 나중에 밝혀진 남자의 과거는 ‘인간 실격’에 가까웠지만, 그는 그 과거를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니체는 “건망증이 있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외쳤고 들뢰즈는 “기억이 욕망을 고착화시킨다”고 말한다. 마치 구세군 악단이 관습적으로 연주하던 음악과 단절(혹은 망각)하고 로큰롤과 탱고, 블루스까지 다양한 음악을 결합시킴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경직된 몸과 표정을 이완시키듯이, 남자의 망각은 관습적으로 이끌려 가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욕망을 발견하는 계기였다.

영화의 엔딩에서 남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이르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선물한 남자가 함께하는 친목회 장면은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흥이 넘친다. 이 엔딩처럼 카우리스마키의 낙천적인 세계관의 바탕에는 하층 계급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에 믿음이 깔려 있다. 홍성남이 “망각이 건설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적절하게 지적(523호)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악의적으로 잊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처럼 정신적 부활을 가져오는 남자의 행운은 ‘자비로운 망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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