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월래스와 그로밋: 하반신의 비밀
2005-11-07
글 : 이다혜
충견 그로밋, 드디어 입을 열고 숨겨온 정체를 드러내다

세상에 별 도움 안 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눈물을 쏟다 죽을지도 모르는 월래스와 바지런하고 영리하며 충성심 강하기로는 충견 래시 뺨치는 그로밋의 팬으로서, 그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단편과 장편을 보고 또 봐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몇 가지 있다. 언 발에 오줌누기 격으로 잠시의 곤궁은 해소해도 결국은 스스로를 곤경에 밀어넣는 기괴한 발명품들을 전문적으로 고안해내는 월래스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에게는 왜 가족이 한 ‘사람’도 없는 걸까? 게다가 월래스에게는 친구도 없다. 평범한 남자(?)라면 여자 옷을 투시해 알몸을 보는 기계를 고안하거나, 광속으로 달리는 스포츠카를 생각해내겠지만, 월래스는 어쩐 일인지, 치즈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우주선을 발명(<화려한 외출>)해 거대한 치즈 덩어리인 달로 떠나고, 그로밋을 직접 산책시키는 일도 귀찮아졌는지 생일선물이랍시고 산책용 전자바지를 만들어 선물할 뿐이다(<전자바지 소동>). 월래스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로밋이다. 인간의 가장 좋은 벗이 개라고는 하지만, 그로밋은 월래스 대신 일을 도맡아 해 생계를 유지하고(<양털도둑>), 월래스가 자신을 냉대해서 급기야 가출까지 했으면서도 그가 위기에 처하자 두발 벗고 구명작전에 나선다(<전자바지 소동>). 이런 강아지 있으면 내게 한 마리 구해주시라! 말 한마디 없어도, 팬티 한장 안 걸쳐도 씩씩하기 그지없는 그로밋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바로, 그가 수컷인지 암컷인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로밋의 그 수상쩍도록 매끈한 하반신이라니. 월래스와 그로밋의 첫 번째 장편영화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 한국 개봉을 앞두고, 월래스의 침실을 찾아간 그로밋과 동행해보았다.

그로밋: 주인님, 잠깐 일어나보세요.

월래스: (눈을 부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로밋? 너 지금 말을 하는 거니?

그로밋: 저는 말을 할 줄 안답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는 거 못 보셨어요? 플라톤의 <공화국>은 또 어떻고요? 글도 읽는데 당연히 말도 하지요.

월래스: 그럼 왜 그동안 말을 안 한 거지?

그로밋: (어깨를 으쓱하며) 제가 말까지 하기 시작하면, 주인님이 더 제게 많은 일을 떠넘기실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힘없이 늘어진 월래스의 뱃살을 툭툭 치며) 주인님 뱃살 좀 보세요. 이왕 토끼의 삶을 체험하신 김에 채식주의자가 되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월래스: 하지만 난 치∼즈가 좋아!(두 손을 주먹쥐고 얼굴 옆에서 흔드는 월래스, 열광적인 표정을 지으며 군침을 흘린다) 치∼즈!

그로밋: 집에 남은 치즈도 없어요.

월래스: (창밖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며) 달에는 치즈가 있는걸! 우리 다시 달에 갈까? 집에 크래커는 많이 있어.

그로밋: (커다란 귀를 기운없이 늘어뜨리며) 왜 주인님은 쓸데없는 발명품을 만드는 데만 열광적이신거죠?

월래스: (강한 영국 악센트로) 그로밋, 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단다. 치즈를 크래커에 얹어 먹는 사람과, 치즈를 크래커와 함께 먹는 사람. 치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발명할 수 있지.

그로밋: 지난번에 ‘전자바지’는 왜 만드신 건가요? 생일선물이랍시고 개에게 개목걸이와 개줄, 그리고 개줄을 묶어서 산책시킬 수 있는 전자바지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주인님뿐이라고요. 개껌, 특식 개사료, 이런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하셨나요? 저를 산책시키는 게 그렇게 귀찮으셨나요?

월래스: (눈을 껌벅인다, 거짓말을 지어내느라 눈동자가 불안정하다) 그런 건 아니고, 난 그저 너의 웰빙 라이프를 위해 산책 기계를 발명했을 뿐이란다.

그로밋: 게다가 <전자바지 소동> 때 간사한 펭귄에게 제 방을 내주신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주인님을 결국 곤경에 빠뜨린 사악한 자를 못 알아보신데다가, 제가 가출한 것도 모르셨잖아요.

월래스: 그건, 생활비가 없기 때문에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었단다. 그나저나, ‘슈퍼 야채 선발대회’ 출전을 위해 키우고 있는 너의 그 거대한 호박은 잘 크고 있니? 그거면 한달은 거뜬히 먹고 살겠더구나!

그로밋: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얼마나 공들인 호박인지 아시면서. 그나저나, 레이디 토팅톤에게 ‘애프터 신청’은 하셨나요?

월래스: (치즈 얘기를 할 때처럼 얼굴 양옆에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가늘게 뜨며 열광적으로 환호한다) 레이디 토.팅.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지 않니? 그녀라면 나의 발명의 세계를 이해해줄 것만 같아. <양털도둑> 때 겪은 실연의 아픔을 깨끗이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로밋: 요즘 몸짱이 유행이라니까, 치즈 줄이시고 운동을 해보세요. (다시 월래스의 배둘레햄을 두들긴다) 레이디 토팅톤이 근육질의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요. 운동 열심히 하시면 제가 퐁듀 만들어드릴게요.

월래스: 퐁듀! 역시 그로밋이라니까. 그럼 나는 이만 잘 테니까, 토끼떼가 마을에 출몰하거든 네가 녀석들을 잡으러 가려무나. 그나저나 그로밋, 너 이마에 손자국 찍혔다. 자기 전에 클린싱을 잘해서 이마의 지문은 꼭 지우도록 하려무나. 우리를 만든 조물주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은 가끔 지문을 우리 이마에 남겨놓곤 하지. (양팔을 뻗으며 크게 하품한다) 내일 퐁듀 해주는 것 잊지 말아줘!

그로밋: (곤히 잠든 월래스를 바라보며 입고 있던 개 복장을 벗는다) 월래스, 이제 너도 장가 가야지. 레이디 토팅턴과 잘해보려무나. 네가 궁금해했던 내 매끈한 하반신의 비결은 3만9900원에 홈쇼핑에서 특가 찬스로 구입한 그로밋 코스튬 덕분이란다. 개의 탈을 쓴 아버지라고나 할까. (침대 곁에 메모를 적어 놓는 그로밋. 메모지에는 ‘월래스, 팬티 빨아놨다, 집으로 돌아와라’라고 적혀 있다) 이 사실을 지금까지 숨겨와서 미안하다만… 실은, 내가 네 아비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