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삶을 마치 삶과 같이 살아낸다는 것, <카페 뤼미에르>
2005-11-09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허우 샤오시엔 <카페 뤼미에르>의 진짜 관심사는 무엇인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제작했던 일본 영화사 쇼치쿠에서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탄생 100주년 기념이 될 만한 영화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2003년 <카페 뤼미에르>가 탄생했다. 오즈는 1903년 12월12일 동경에서 태어나 60년 뒤인 1963년 12월12일 동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7년부터 감독으로 활동했던 오즈의 초기 영화적 커리어는 상당 부분 일본의 대만 점령 시기 (1895-1945)와 겹친다. 전후 일본 사회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렸던 오즈의 세계는 외양적으로는 탈정치화 된 소시민적 세계다. 소위 다다미 숏, 필로우 숏, 탈-180도 라인이 감싸안은 미학적으로 형식화된 일본 중산층 가족의 서사는 일본 문화라는 특수성과 결합되어, 1951년 <라쇼몽>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입상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펙터클한 세계와 함께 동아시아 영화를 대표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시기 미국의 일본, 한국, 대만 지배와 맞물려 탈정치화된 미학적 오즈가 ‘아시아’ 감독으로 꼽힌 것은 사실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문화 정치적 사건이다.

이 그림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사실 허우 샤오시엔의 등장 이후다. 1989년 <비정성시>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그의 대만 현대사 삼부작-<비정성시>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이 차례로 만들어지면서 그는 오즈를 이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를 그대로 잇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즈의 명성을 만들었던 그 무엇과 단절하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일본, 미국만이 아니라 그 이전 네덜란드와도 얽혀있는 대만의 피식민화의 역사와 대만 내부의 원주민 소수민족의 문제 그리고 현재 중국과의 지정학적 긴장 그리고 허우 샤오시엔이 주술 걸 듯 불러내는 과거의 유령들은 그의 영화를 정치, 역사와 분리해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오즈 야스지로의 360도 형식과 허우 샤오시엔의 롱테이크 형식을 등가로 놓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한마디로 오즈 야스지로와 허우 샤오시엔은 비견이 아니다. 등가의 비교가 아닌 것이다.

오즈와 허우 샤오시엔의 차이 혹은 접점

서론이 좀 길다. 그러나 나는 <카페 뤼미에르>에 대한 평이 그 허우와 오즈 사이의 유사성과 친연성, 혹은 허우가 오즈에 대해 경배(오마주)하는 형식(예컨대 다다미방에서 낮은 아이레벨 앵글로 잡힌 투 숏이 등장하는 것), 인물들의 채용(딸과 아버지가 중심으로 오는 가족 관계) 그리고 유사 모티브(기차의 빈번한 등장), 또는 더 직접적인 오즈 영화들의 인용(<만춘> <동경 이야기> <피안화>)를 지적하는 형식적 유사성의 탐색으로 채워진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처럼 대만과 일본 역시도 가까운 과거, 식민과 피식민의 관계였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요코가 관심을 두고 조사하는 과거의 인물, 대만 출신으로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를 다녔던 장웬예도 일제 강점기에 역시 우에노 음악학교를 나왔던 홍난파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오즈의 세계로 들어가면, 순하게 보이는 미학적 세계에 포박되는데, 오즈를 기념하는 <카페 뤼미에르>에 대한 대부분의 평들이 그 주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대중적 기억으로 보자면 대만인은 한국인만큼 일본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일본 지배 이전의 네덜란드, 중국의 지배가 참혹했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 들이닥친 국민당 정권은 허우 샤오시엔이 <호남호녀>에서 다루고 있는 “백색테러” 학살에서 드러나듯 가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점령기와 관련된 대만의 역사는 허우 샤오시엔의 <희몽인생>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생존하는 전통 인형극의 대가 리텐루의 1909년에서 1945년까지의 인생을 다룬 이 영화의 식민지 시대의 삶에 대한 지혜는 바로 리텐루 자신이 전시체제가 가동되기 전에 만들었던 인형극단 ‘이완루’(마치 삶과 같이)라는 이름에 응축되어 나타난다. 삶의 본질적인 고정점을 상정하거나 회귀해야 할 원점이나 기점을 상정하는 대신, 이완루는 삶의 완만한 테두리, 유사 배열을 가리키며 원전과 모방이라는 위계보다는 근접성을 시사한다. 이것은 대만이라는 국민-국가의 (비)형성과 관계있으며, 수많은 주인들이 지배하고 착취했던 역사에서 추출된 인생관이기도 하다. 즉,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어떤 원형,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델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과 하인의 위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의 근본과 파생이라는 진화적 관점이 아닌 유사성과 근접성에 근거해 ‘마치 삶처럼’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탈식민이론에서 주장하는 모방이론과도 차이가 있는 것이, 여기에는 모방의 대상이 되는 원전, 삶조차도 이미 삶과 유사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삶은 꿈이다’라는 정의와도 다르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분절되지 않는 응시의 롱테이크와 흐릿한 조명, 저음의 대사, 물결 같은 동작 등 꿈의 구조와 유사한 형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꿈의 세계와 등치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그의 세계는 리얼리즘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대만의 일부 진보 평론가들로부터 <비정성시>가 백색공포 시대의 무자비한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너무 혈흔없이 재현했다는 비난을 받은 근거가 되기도 했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카페 뤼미에르>. 사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로 난맥이다. 기차와 전철의 레일들만 시시때때로 복잡하게 얽혀드는 것이 아니라, 요코의 마음도 정황도 얽혀 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동경을 횡단하는 전차와 기차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는 복잡하다. 허우 샤오시엔의 <연연풍진>에서 타이베이로 향하던 기차의 모노레일은 사라지고, <카페 뤼미에르>의 동경 철로는 하나의 방향성이 없다.

여하간, 영화의 처음을 기차가 연다. 요코(히토토 요, 아버지가 대만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 가수)가 빨래를 베란다에 널고 있다. 하지메(아사노 타다노부)의 전화가 오고, 이웃이 찾아온다. 요코는 이웃에게 선물로 대만산 펭리수(파인애플 과자)를 건네준다. 요코는 하지메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바꿔치기 당하고 아이의 얼굴이 얼음으로 변해 녹아내리는 것을 본다는 내용이다. 만일 이 장면이 콘트라스트가 있는 조명으로 감싸인 채 으스스하며, 사운드의 데시벨이 난데없이 높아지고, 카메라가 요코나 어떤 미지의 대상을 향해 움직였다면 능히 공포 영화의 도입부가 될 만한 설정이다.

그러나 <카페 뤼미에르>는 판독 가능한 장르 영화의 관행으로 가는 대신 도시에 대한 민속지 쪽으로 가깝게 다가간다. 하지메는 골목에서 고서점을 하며 기차와 역사의 소음을 채집하고, 요코는 예의 장웬예의 행적을 조사한다. 영화에 가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은연중 요코가 탐사하는 동경이라는 도시에 다중인화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요코의 현재, 과거와 관계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본의 다른 도시들(홋카이도)과 장소(타카자키) 들이며, 요코가 막 떠나온 타이베이다. 요코가 환기시키는 공간이 개인적, 공적으로 시간화, 역사화 되어 있는 셈이다. 반면 하지메의 공간감은 자신이 그린 컴퓨터 상의 일러스트레이션인, 철로 안에 웅크린 태아의 그림이 보여주듯 방어적이거나 모호하다. 대만을 왕래하며 대만인 남자친구의 아이를 잉태한 요코와 2대째 동경에서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하지메의 차이는 은연중 이렇게 드러난다.

요코의 임신은 이 영화에 소음과 파장을 일으키는 근간이 되는데, 요코 자신은 북유럽의 신화에서 길어올린 원형적 이미지들로 악몽을 꾼다. 또한 이 임신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나쁜 기억을 불러온다. 요코가 네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연금으로 과연 저금 한푼 없는 요코와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근심한다. 요코는 아이는 낳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언한다. 이유를 묻는 새어머니에게 그녀는 대만의 남자친구가 어머니에게 너무 의존하고, 또 결혼하면 그들과 동일한 가족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요코가 대만의 남자친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일본의 정신분석학자인 헤이사쿠 고사와가 소위 일본적 오이디프스 신화로 밝힌 아자세 콤플렉스를 투사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심리적 꼬임 속에서 요코는 지도를 들고 도시를 헤맨다. 전철을 타고 안내 방송을 들으며 , 골목을 지나 방문지를 찾는다. 특히 요코와 하지메가 카페에 들어가 창을 뒤에 두고 앉는 순간은 짧은 안도감을 준다.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뒤편 창 멀리 군중들이 꼬물꼬물 지나가는데 이 장면은 그야말로 뤼미에르가 활동했던 초창기 영화의 매혹을 불러온다. 사람들이 영화에 매혹된 이유 중의 하나가 앞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그것은 연극 무대에서도 가능하다), 바로 배경의 덤불이나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카페 뤼미에르>는 그 매혹을 잊지 않는다.

<카페 뤼미에르>는 일본과 대만의 관계를 요코와 대만 남자친구 사이에서 잉태된 아이, 대만 출신 음악가 장원예의 흔적을 통해 지속적으로 불러오지만,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적 알레고리로 내몰지는 않는다. 또 요코의 불안에 분석가능한 대상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입히지만 결코 분석으로 가지는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그녀의 손에 지도를 쥐어주고 하지메에게 녹음 장비를 쥐어준다. 그러나 영화에서 아직 희망이 오지는 않았으며, 또 별로 그럴 이유도 없다. 영화의 관심은 희망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완루”, 마치 삶처럼 삶을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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