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2]
2005-11-1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아픈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이터널 선샤인>

주인공은 뉴욕에 살고 있는 조엘(짐 캐리)이다. 그는 옆집 사람이 자기 차를 찌그러뜨렸다고 여기면서도 그냥 참고 넘어갈 만큼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다. 영화는 잠에서 깨어난 그가 회사로 가던 중 무작정 몬타우크행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순간에도 조엘은 자신이 왜 일상을 벗어나 몬타우크행을 선택했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을 만나고, 그녀의 활달한 성격 덕분에 금세 친해져, 그 다음날은 찰스강에 같이 놀러가서 꽁꽁 언 강바닥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멋진 추억도 만든다. 게다가 그녀는 농담처럼 “우리는 분명히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조엘과 그걸 보는 세심한 관객을 동시에 당황시킨다. 그리고 날이 밝아 클레멘타인을 집에 데려다줄 때, 그녀는 갑자기 조엘의 집에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조엘은 좋다고 말한다. 짐을 챙기겠다며 집으로 들어가는 클레멘타인. 잠시 뒤 한 남자가 밖에서 기다리는 조엘의 차창을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조엘은 이 사람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그때까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암전. 첫 번째 시퀀스가 끝나고 두 번째 시퀀스가 시작된다. 영화는 울며 차를 몰고 있는 조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뜬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제부터 영화는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즉, 이 영화의 플롯은 시간을 역순으로 따라가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 첫 번째 시퀀스와 두 번째 시퀀스의 관계는, 혹은 이 영화의 ‘무작위적인 듯한 그러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패턴으로서의 역순 구조’는 한참이 지나서야 실체를 잡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단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이전에 서로 사랑‘했던’ 관계였고,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한번 헤어졌고, 클레멘타인은 이미 조엘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엘 역시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지우겠다며 ‘기억 말소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고, 그리고 그 말소의 과정이 아름다운 추억의 정점에 이르자 조엘의 무의식이 그것을 거부하면서 차츰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뒤로 돌아가며 점차 지워지고 있는 조엘의 기억, 또는 조엘의 주관적 1인칭으로 보여진다. 카우프만은 이에 대해 “이것은 관계의 이야기다. 그러나 당신이 진짜 보고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조엘의 해석이다. 우리는 클레멘타인에 대한 조엘의 기억과 그의 기억에 대한 그의 해석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간명하게 설명한다.

카우프만식 플롯을 공드리식 기법으로

카우프만이 각본을 맡지 않았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의심할 바 없이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해 <이터널 선샤인>은 카우프만적인 플롯 구조의 영향 아래 있다. 무엇보다 망각을 매개로 한 ‘개조와 각색, 적응의 드라마’(즉, 어댑테이션이라는 중의적 함의 자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카우프만적 장소인 ‘뇌 혹은 무의식’에서의 탐험이 뇌 바깥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내용들과 교차하면서 영화를 더 교묘하게 배열해간다. 여기에 미셸 공드리의 시각적인 재주가 접목된다. 즉, 카우프만적인 요소들을 따라 <이터널 선샤인>의 플롯이 세워져 있다면, 그 점을 영리하게 시각적으로 스타일화하는 것은 미셸 공드리다. 공드리는 이 영화에서 최대한 현실성을 가지려 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뉴욕에서 6주간이나 머무르며 그 도시의 공기를 사진으로 담기 위해 애썼고,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그를 유명하게 했던 현란한 기법과 기교들을 오히려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뮤직비디오 기법만 놓고 비교한다면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스타일이 위축되었던 <휴먼 네이쳐> 이후 그 스타일을 어떻게 다시 적절하게 영화에 활용할 것인지를 자문한 결론이기도 하다. 사실 <이터널 선샤인>의 매력은 그가 뮤직비디오에서 활용한 형식들을 적절히 혼용한 점에 있기 때문이다.

치보 마토의
비욕의

위위의
벡의

그의 뮤직비디오에는 몇몇 개념이 특정적으로 반복 출현한다. 이를테면, 그의 뮤직비디오에 많이 등장하는 잠자는 주인공들, 또는 잠에서 깨어나는 주인공들, 그 주인공들의 꿈 또는 그 꿈에 맞먹는 현실의 초현실적 확장(비욕의 <Hyperballad>, 캐미컬 브러더스의 <Let Forever Be>, 치보 마토의 <Sugar Water>, 푸 파이터스의 <Everlong> 등등)이 다시 한번 조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또는 그 시각적 초현실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드리가 주로 사용해왔던 한 방편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연극적 무대의 효과를 영화적 시각 장치의 효과로 치환하는 것이다. 즉 연극 상연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상영하는 것인데, 가령 연극의 막이 바뀌고, 전면에 새로운 공간이 들어서듯 그의 공간들은 일순간에 막과 막 사이에 새로 설치된 것인 양 바뀌기 일쑤다. 그것이 물론 뮤직비디오의 오랜 차용 양식이긴 하지만, 공드리의 경우에는 그것을 만화경의 수준으로까지 몰아붙이거나, 놀라운 공간의 변화로 이어진다(캐미컬 브러더스의 <Let Forever Be>, 비욕의 <Achelorette>, 벡의 <Deadweight> 등). 즉, 무의식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과정 속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기괴한 이미지의 주인공이 된다. 서점과 가정집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순식간에 이어지고, 공중에서 갑자기 차가 떨어지고, 바닷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침대가 놓여지고, 멀쩡한 집 천장 위로 비가 쏟아지고, 그 자리에 있던 인물은 한순간 사라지는 등 비상식적인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게다가 그 조엘은 무의식의 조엘과 의식의 조엘로도 나뉘는데, 그런 설정은 공드리의 뮤직비디오에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요소들인 ‘분신’의 출현을 적절히 도입한 것이기도 하다(그 극단적인 예로는 카일리 미노그의 <Come Into My World>). 말하자면, 공드리는 자신이 뮤직비디오에서 익힌 바로 그 솜씨와 개념을 <이터널 선샤인>에서 능숙하게 접목하고 있다. 공드리의 차기작 중에는 공드리 자신이 각본을 쓴 꿈에 대한 소재가 있다. “꿈속의 인물들이 볼모로 잡고 놓아주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건 찰리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의 첫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드리에 대한 영화연출가로서의 비전은 아마도 그 작품에 가서야 좀더 냉정하게 판가름날 듯하다.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영리한 대중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비판적 대응물이냐는 질문에 찰리 카우프만은 그렇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미셀 공드리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둘이 이견을 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어차피 장르적 공유로 잡힐 만한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이터널 선샤인>이 저능하게 답습되는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 아니라 대중영화의 어떤 창조적 전범으로서 사랑을 다루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구태의연한 장르에 대한 대응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는 점이다. 비평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적 영리함을 지니고 있는 수준이지, 영화적 불가해함까지는 갖고 있지 못하다. 쉽게 말해 많이 똑똑한 정도다.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은 근래 개봉한 외국영화 중 대중영화의 모범적인 작품으로 꼽기에 충분할 만큼 성실한 견고함이 있다. 대중영화의 최선이란 기적은 없어도,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흥분된 재주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터널 선샤인>에는 그것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

영화 속에서 라쿠나 직원이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때 우리는 이 말이 영화가 전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우연히도 이 영화가 전하는 진짜 잠언이 얼마 전 어떤 한국영화가 선택했던 바로 그 문장, “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이라는 니체의 또 다른 전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말하자면, 영겁회귀의 철학적 우주를 영화적인 삶의 드라마로 재치있게 체화하는 것은 <이터널 선샤인> 같은 순도 높은 대중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이 영화의 가치다.

미셸 공드리의 뮤직비디오

뮤비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흔적을 찾아보세요

미셸 공드리의 뮤직비디오들은 형식적으로 큰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의 개념을 선택한 뒤, 그것을 이미지 구성의 구조화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작품의 수준에서 그의 대표작은 따로 있겠지만, <이터널 선샤인>에서 보여준 시각적 스타일과 유사한 뮤직비디오들은 주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많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침대가 난데없이 해변 한가운데로 옮겨가듯이, 벡의 <Deadweight>에서는 해변에 사무집기를 놓고 일하는 엉뚱한 남자의 이상한 장면이 펼쳐진다. 또는 캐미컬 브러더스의 <Let Forever Be>에서는 잠에서 깨어나는 한 여자가 7명의 분신으로 복제되어 보드빌 쇼와 만화경 같은 이미지를 종횡무진 횡단한다. 분신의 출현 중에서도 카일리 미노그의 <Come Into My World>는 하나의 반복 구조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같은 골목길을 네번 도는데, 한명으로 시작했던 주인공은 한 바퀴를 돌아 같은 지점에 도착할 때마다 불어나 네명이 되고, 게다가 주위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도 넷으로 불어난다.

치보 마토의 <Sugar water>는 <이터널 선샤인>의 시간 구조에 대해 단서를 준다. 두개의 분할 화면이 있고, 잠에서 깨어난 두 여자는 각각의 화면에서 한명은 뒤로 진행되고, 또 한명은 앞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화면의 좌우를 바꾸면서 진행 방향도 바꾼다. 그러고는 다시 처음 잠에서 깨어난 서로의 장소로 간다. 그러고나서 그들이 창가에 쓰는 것은 동일하게 ‘SUGAR WATER’라는 글자다. <이터널 선샤인>의 시간적 플롯에 대한 일종의 전형이다. 만약 <이터널 선샤인>에서 공드리가 보여준 시각적 스타일에 관심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지난 뮤직비디오를 찾아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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