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올해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2]
2005-11-1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두 시간짜리 장편 졸업작품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망각을 잊는 역설의 길을 걸었던 윤종빈 감독은 그러고나서도 한참을 이어진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야만 했다. 대학생이 졸업작품을 찍는다는데, 그것도 두 시간짜리 장편영화인데, 누가 시간과 돈을 흔쾌히 던지겠는가. 다행히도 그에게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천만원과 미쟝센단편영화제 상금 500만원이 있었고, 여기에 자비 500만원을 보태어 촬영은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 자>가 상업영화 못지않은 재미를 가질 수 있었던 건 꼼꼼하게 닦아놓은 프리 프로덕션 과정과 감독의 의지 덕분이었다.

정학과 파출소 출입 여부를 묻자 반쯤은 침묵으로 긍정해주었던 윤종빈 감독은 독하게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외할머니댁 부근 독서실에 몸을 묻고 보냈다. “당연히 친구들은 욕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했다.” 게다가 막무가내의 기질도 조금은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원한 법대는 가고 싶지 않았던 그는 놀 만한 학과가 뭐가 있나 입시요강을 뒤지다가 영화과라는 단어를 발견했고, 특차합격을 포기하면 재수를 해야 한다는 제도를 악용하여, 아버지 몰래 중앙대 영화과 특차전형에 원서를 내버렸다. “지금이었다면 설득을 해보려고 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때는 나 이거 할래, 하고는 대화를 끝내버리던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영화라고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인상적이었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만 보았을 뿐인, 영화과 학생 윤종빈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서야 영화에 사로잡혔다(그는 제대하고나서 <생활의 발견> 연출부에 응모했지만 서류 전형에서 떨어진 아픈 기억이 있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지금 이 공간의 느낌,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의 몸짓, 이런 것은 수백 마디의 문장으로도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예비군 과정이 끝날 때까지도 군대 무용담을 되씹고 앉아 있는 것보다 영화 한편이 더욱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프리 프로덕션 과정은 여섯달에 달했다. 입대하기 전에 만든 자신의 단편영화를 보면서 너무 재미없어 기가 막혔던 윤종빈 감독은 2년 내내 숙제로 남겨진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되씹으며 보냈고, 똑 떨어지지는 않아도, 조금씩 해답에 다가선 듯했다. 그는 촬영을 시작하기 다섯달 전부터 배우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그들을 관찰하여 시나리오를 매만졌다. 심지어 내무반 분량은 3일 만에 촬영을 끝내는 괴력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군에서 촬영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용산을 드나들며 하도 귀찮게 했더니 3일만 촬영하라고 하더라. 있던 장면을 없애고 장면 몇개를 합하면서 정신없이 찍었다. 원래는 장교와 사병이 무수히 등장하는 떼신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결과는 매끈하다. 영화를 본 이들이 “나도 저런 고참 있었다”고 입을 모으는 마수동 병장처럼, 조연인 캐릭터에까지도, 현실과 픽션이 적절히 혼합된 생명력이 넘쳐난다.

“분명한 건 빨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

윤종빈 감독

아르바이트로 뮤직비디오 조감독이나 시나리오 각색을 하면서도 제작과정을 눈여겨보았다는 윤종빈 감독은 나이 어린 젊은이답지 않게 제작비 계산에 밝다. 그래서 2천만원으로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사람의 힘을 다하고 그 다음엔 천명을 기다린다 했던가. 어벙한 허지훈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조차도 배우의 스케줄까지 원하는 대로 조정하지는 못했다. 여름에 촬영을 마치고 비어버린 몇달간. 스탭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프리 프로덕션부터 잡무를 도맡았던 조감독은 간신히 붙잡았지만, 회한이 마음을 휘저었다. “스탭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엎겠다고 말한 적이 두번 있다. 하지만 집에 가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분해서 잘 수가 없는 거다. 여자친구가 도망갔을 때보다도 힘들어서, 이 영화를 완성해야만 할 것 같았다.” 35회 만에 촬영을 마친 그는 닷새 동안 밤을 새며 편집과 믹싱을 했고, 졸업영화 시사회 한 시간 전인 아침 아홉시에 테이프를 제출한 뒤, 집에서 내처 잤다. 그 영화를 본 이현승 감독이 극장 개봉을 하자며 배급사 청어람을 소개했으니, 범상한 재능은 아니었던 듯싶다.

요즈음 윤종빈 감독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느라 마치 자기 삶이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가들은 머리 속에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형상으로 만드는지 보고 싶었는데, 장편영화 연출부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다음 영화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고민이고, 가끔은 뭐라 답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낯선 인터뷰도 이어진다. 다만, 지루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동어반복이 되면 관객도 나도 지루할 것 같다. 심리적인 서스펜스가 담긴 영화를 생각하고도 있고. 분명한 건 빨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거다. 영화를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시간이 너무 심심하다.” 어릴 적부터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여 가끔 손에 경련이 일기도 한다지만, 힘이 넘치는 나이 스물일곱. 윤종빈 감독에겐 지금이 아직 시작조차 아닌지도 모르겠다.

영화로 군대를 배운 배우들

주·조연 배우 캐스팅에 관한 진실

윤종빈 감독은 대한민국 남자 90%가 군대에 갔다고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의 배우들은 그 비율이 반대에 가까웠다. 하정우(태정 역)를 제외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공익이나 면제 혹은 의경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감독과 배우들은 함께 모여 수십번 리허설을 하며 상황을 몸에 익혔고, 스케줄 때문에 몇달 촬영을 쉬었을 때는, 다시 한번 모여 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하정우(태정 역)
윤종빈(지훈 역)
서장원(승영 역)

<잠복근무> <프라하의 연인>으로 눈에 익은 하정우는 가장 먼저 캐스팅된 배우였다. 윤종빈 감독은 연극에 출연한 하정우를 눈여겨보았다가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하정우는 싸이더스HQ에 속해 있어서 시나리오 전달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운도 좋아서, 매니저가 윤종빈 감독이 잘 아는 선배였다. 그리하여 윤종빈 감독은 “독립영화를 위해서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의명분과 시나리오에 대한 호감도를 이용하여 센스가 있고 상황파악 능력이 뛰어난 하정우를 기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승영이었다. 승영은 연기력보다 외모와 이미지가 들어맞아야 했다. 석달 동안 수많은 배우를 만났지만 연기력이 좋다 싶어도 이미지가 어긋났다. 서장원은 윤종빈 감독의 단편에 출연했던 배우가 추천한 인물. 윤종빈 감독은 그를 만나자마자 연기력을 테스트해보지도 않고 머리를 깎을 수 있는지 물었다. 이목구비가 자그마하고 유약해 보이면서도 지식인의 분위기를 가진 서장원은 중견탤런트 서인석의 아들이고, 예명을 사용하는 하정우 역시 중견탤런트 김용건의 아들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세 번째 배우는 바로 감독 자신이다. 마땅한 배우를 찾지 못했던 윤종빈 감독은 자기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직접 출연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감독과 배우를 겸하면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몸으로 연기를 한다는 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면이 있다. 카메라 앞에 서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 밖에도 감독과 대학동기인 마 병장 역의 임현성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배우가 아마추어였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익히고 말투에 맞도록 시나리오도 고쳤기 때문에, 언젠가 내무반에서 직접 일어난 사건을 찍어둔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사진 최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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