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임권택 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 아역배우 오디션
2005-11-17
글·사진 : 전정윤 (한겨레 기자)
할아버지가 손녀 대하듯…“어이, 잘 한다”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태흥영화사 2층 사무실에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두 아역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진행되고 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앵도를 주랴 포도를 주랴…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 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태흥영화사 2층 사무실. 업고 놀면 딱 좋을 듯한 어린이들이 앵도 같고 포도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멋드러지게 판소리 한 소절을 뽑아 제낀다. 안경 너머로 어린이들의 뒤태, 앞태, 걷는 태를 흐뭇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은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그리고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gt;에서 주인공 오정해, 김영민의 어린시절을 연기할 아역배우를 뽑는 오디션 현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4학년…”

이날 오후 1시, 12번째 오디션 참가자이자 오후 오디션의 첫번째 참가자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주 전일초교 4학년 신지운입니다. 판소리 명창 김영자 선생님께 춘향가를 사사했습니다.” 노란저고리, 분홍치마를 차려입고 댕기머리를 따내린 밤톨 같은 소녀의 야무진 인사에 ‘어르신’들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허허허, 허허허” 웃음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 또 ‘준비된 멘트’가 이어진다. “다음은 연기를 발표해드리겠습니다. ‘이 돌밭쯤 거뜬히 매고 돌아가면 새어머니도 분명히 기뻐하실거야…’.” <콩쥐 팥쥐>의 ‘콩쥐’가 되어 밭 일구는 시늉을 내던 신양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호미가 부러져 버렸다”더니, “흐흐흑 흐흐흑” 짐짓 서러운 척을 하며 눈물 연기를 선보인다. 신양이 자유선택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도 ‘2005 국창 정정렬 추모 익산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초등부 최우수상’ 수상 경력을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다.

“판소리는 몇년이나 했느냐?”

“어이, 잘 한다.” 임 감독이 한 마디 거들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박수’로 동의를 표한다. 이어 “판소리는 몇년이나 했느냐?”는 임 감독의 질문에 “2학년 때부터 한 걸로 치면 3년, 지금으로부터 치면 1년”이라는 불가해한 답변이 돌아왔지만, 임 감독은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대하듯 “1년 한 것 치고는 잘 하네”라며 신양의 말을 너그럽게 헤아려준다.

이날 오디션에는 모두 25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참가했다. ‘소리를 하고 북을 잡을 줄 아는 10~12살 가량의 어린이’라는 까다로운 조건 탓에 오디션에 응시한 어린이들은 50여명 정도. 이 가운데 서류심사를 통과한 어린이들이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리고 신양을 비롯해 모든 참가자들이 에이4 용지를 가득 메울 만큼 화려한 판소리 대회 수상 경력을 갖고 있었다. 임 감독은 “<서편제> 때는 이렇게 좋은 아이들이 소리를 배우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리만 좀 하면 그저 고마웠었다”며 “이번에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줘서 우열을 가리는 데 어려움이 크지만, 우리 소리의 장래가 밝은 것 같아 너무 기쁘다”고 흡족함을 나타냈다.

<서편제> 때와 달라진 것은 ‘꼬마 명창’들의 일취월장한 재능만이 아니었다. 고 김소희 명창으로부터 사사한 오정해가 영화 출연 당시 스승과의 갈등설에 시달렸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안숙선, 신영희 명창 등 스승들이 직접 나서 재능있는 제자들을 적극 추천했다. 이날 지하에 마련된 ‘학부모’ 대기실에는 두 제자를 데리고 대구에서 올라온 지미희(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8호 이수자) ‘선생님’이 두 손을 모으고 제자들의 선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오디션 광고를 보고 소리 잘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왔다”며 “두 제자가 나란히 <천년학>의 오누이 역할을 맡으면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오디션은 두 주연 배우의 어린시절을 연기할 아역배우를 찾는다는 점에서, 판소리나 연기실력 이외에 오정해, 김영민을 ‘닮은 외모’도 중요한 평가 요소였다. 오디션 참가자들은 이를 위해 판소리와 연기가 끝난 뒤 캠코더 앞에서 360℃를 회전하며 앞·옆·뒷모습을 차례차례 내보여야 했다.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던 한 여자 어린이는 판소리 <적벽가>를 멋드러지게 불러 심사위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아이고, 소리를 너무 잘 허(해)요”라고 감탄을 자아냈지만, 캠코더에 연결된 브라운관을 통해 비친 모습은 가녀린 오정해와 사뭇 달랐다. 정 촬영감독은 “우량하다……”라는 말로 큰 아쉬움을 압축해 드러냈다.

이번엔 명창도 제자추천 나서

이날 오디션에서는 결국 황승옥 광주대 교수로부터 사사받고 송순섭 명창의 추천을 받아 참가했던 황시온(9·광주 화정초3) 양과 안숙선 명창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김덕수 선생에게 북을 배운 윤제원(10·서울 신광초4) 군이 각각 송화와 동호 역으로 뽑혔다. 두 사람은 <서편제>에 나왔던 송화와 그의 ‘피 다른’ 동생 동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룰 <천년학>에서, 임 감독의 말처럼 “분량은 많지 않지만 비중은 큰, 송화와 유봉의 어린시절”을 연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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