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고난 영화광이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부터 혼자 극장 가는 걸 좋아했으니 ‘씨네마 키드’라고 할 만했다. 취미를 공유할 만한 친구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영화 이야기를 들으려고 조회 시간 전이나 체육 시간에 내 주위를 산처럼 둘러쌌는데, 영화 그 자체보다는 적당히 과장을 뒤섞은 내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 시절에 가장 인기 있던 배우는 성룡이었다. 6학년 겨울방학 즈음 성룡의 <취권>이란 영화는 관객 70만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OO극장 앞에는 얼음이 얼지 않습니다”라는 상영관의 광고 카피를 신문에서 봤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 즈음 나를 사로잡았던 배우는 성룡도, 이소룡도 아닌 로버트 드니로였다. 무협영화만 줄기차게 보러 다니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왠지 ‘있어 보이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우선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를 골라 봐야겠다는 겉멋(?)이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아카데미상은 좀 어렵지만 고상한 것, 뭔가 특별한 영화의 인증서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가 <디어 헌터>였고 주인공으로 나온 로버트 드니로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드니로는 성룡처럼 신기한 액션을 보여주지도 않고 알랭 들롱처럼 매끈한 조각형의 미남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에게 얘기해줄 만한 것도 없었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던 취미가 <디어 헌터>를 본 뒤 사라져버렸다. “친구의 애인을 흠모하면서도 속내를 감추는 주연 배우의 연기가 죽여주더라”라고 이야기를 꺼냈다면 친구들은 하품이나 해댔을 것이다.
드니로는 눈빛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한 연기를 보여줬다. 베트남전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사람들이 준비한 환영파티에 가지 않고 택시에 탄 채 마을을 곧장 지나쳐버린다. 함께 참전했던 친구들의 행방을 모른 채 혼자만 금의환향한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모텔방에 들어간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안을 이리저리 맴돌다 두통 때문인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파에 걸터앉는다. 드니로가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는 바로 그 순간 ‘카바티나(Cavatina)’라는 곡의 기타 선율이 시작된다. 그 아름다운 음악과 혼란에 빠진 드니로의 말없는 연기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표창을 날리고 깨부수고 날아다니는 것만 멋있는 줄 알았는데 고뇌에 빠진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근사했다. 그게 어찌나 멋스러웠던지 대학생이 되서 소개팅을 나가기 전날엔 친구가 ‘카바티나’를 연주하고 나는 여학생 앞에서 고뇌에 찬 표정을 지어보자는 어처구니 없는 작전을 짜기도 했다.
드니로는 <대부2>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여줬다.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은 지금 다시 봐도 눈물을 훔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는 <성난 황소>에서의 연기다. 영화 초반의 몇분, 흑백의 느린 영상 속에서 홀로 복싱연습을 하는 장면은 아마도 영화사상 몇 안되는 명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는 그 눈빛이나 배역에 몰입하는 드니로의 모습은 배우들 뿐만 아니라 나처럼 인생을 영화처럼 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표상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