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그 정재형. 10년 전, 혼성그룹 베이시스의 일원으로 <내가 날 버린 이유>라는 히트곡을 남겼던 가수. 1999년 솔로앨범을 내놓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가 <오로라 공주>로 돌아왔다. 이번엔 음악감독이다. 애초 그는 방은진 감독이 <오로라 공주> 이전에 데뷔작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첼로>의 음악을 맡기로 했었다. 그러다 방 감독이 <오로라 공주>로 배를 바꿔 탔고, 그도 자연스레 동승했다. “그때는 <입질>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였는데, 방 감독이 파리에 놀러와서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이거 내가 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면서.”
방 감독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전했던, 그는 잠깐 귀국한 사이 우연히 승선자 한 사람을 더 구하게 됐다. 바로 친우 엄정화였다. “정화 집에 놀러갔다가 소파에서 잠깐 잠들었는데, 그때 내가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정화가 몰래 봤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정화 모습이 되게 좋았는데 곧바로 로맨틱코미디를 해야 하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으니까.” 이후 엄정화는 방 감독에게 복수의 칼을 든 순정 역할을 자청했고, 정재형은 본의 아니게 엄정화의 변신을 도운 셈이 됐다. “정말 사람 죽일 것 같은 여자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여자가 순정을 연기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나?”
정재형에게 <오로라 공주>는 데뷔작이 아니다. 이전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영화가 2편 더 있다. <마리아와 여인숙>(1997)과 <중독>(2002). 파리고등사범 음악학교에 진학한 것도 모든 게 영화음악 때문이었다. <마리아와 여인숙>은 감독 얼굴 한번 못 보고 그저 머릿속에서 악보를 그려내야 했던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영화음악의 ABC부터 배우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고, 결국 주저없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탔다. 2년의 정규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클래식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는 한동안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는 담당교수가 난해한 고전영화들만 보여준다. 그러다가 정작 시험 때는 대중적인 코미디영화를 보여주고선 음악을 만들어오라고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영화천국 프랑스에서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명화들을 맘껏 볼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는 그는 “인물 심리가 날카롭게 묘사된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던 차에 <중독>을 만났다. <중독>이 정식 스탭으로 참여한 첫 영화였다면, <오로라 공주>는 만만치 않은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유가 밝혀지기 전까지 순정의 살인은 다소 산만하게 보일 수 있다. 그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야 했는데, 문제는 대사가 너무 많아서 음악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거다.” 일렉트릭한 분위기로 포장해 묶어내긴 했지만, 6개월 동안 학업을 미루고 한국에 머물면서 작업을 한 본인은 아쉬운 것이 많은 눈치다.
순정의 심리를 따르느라 “신경질만 잦아졌다”는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면 학업 틈틈이 이문열의 단편 <그해 겨울>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12월에 자신이 작곡한 클래식 곡의 초연이 국내에서 잡혀 있어서 잠깐 귀국할 예정이라는 그는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도 내놓았다. “음악도, 영화도 마찬가지다. 신인감독들이 너무 빨리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기획된 아이템만을 소화하고 곧 소진되어버리지 않나. 힘든 길이지만, 시스템 바깥에서 작업을 충분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장르를 넘나들며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하기엔 “아무래도 외국이 더 자유로운 것 같다”는 그는 학업을 끝낸 뒤에도 프랑스에 머물며 활동을 모색할 계획이다. “외국에서 영화음악을 공부하는 실력있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독감에 걸려 골골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