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한국영화 사랑한다면 ‘미안하다’ 말하지마요
2005-11-24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얼마 전 <다섯은 너무 많아> 시사회를 나오면서 동료가 했던 말. “요즘 독립영화는 왠만한 상업영화보다 훨씬 재밌어. 완성도도 대단하고.” 이 작품과 <용서받지 못한 자>를 두고 한 이야기다. 부산과 전주 등의 영화제 세례를 받고 최근 전국 개봉을 한 두 영화는 알려져 있다시피 모두 1억원 미만의 초저예산으로 완성한 디지털 장편이며 한편은 대학 영화과 졸업작품이고 한편은 감독이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일하면서 완성한 데뷔작이다. 충무로 제작자나 자본의 도움 없이 제 힘과 동료들의 헌신으로 완성한 영화를 극장에 걸게 된 건 두 감독에게 큰 행운이다. 또한 오로지 재능과 패기만으로 완성된, 참신하고 재미난 영화를 보게 된 건 관객에게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이들의 성공은 분명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자극과 격려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이 이끌어갈 한국 영화계의 밝은 미래를 낙관하기에는 우울한 사건이 두 영화의 개봉시기와 겹쳐 벌어졌다. 에이치디(HD) 영화 연출을 준비하던 한국방송 젊은 피디의 자살기도다. 그가 남긴 장문의 유서에는 그가 그동안 제작비 문제로 심한 마음 고생을 했음이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최악의 상황을 온전히 회사쪽의 문제로만 돌리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예산 문제로 도중에 엎어지는 영화들이 부지기수이고 또 누구는 몇천만원으로 번듯한 영화를 만들어내지 않느냐라고 공격 받았을 때 그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것이다.

앞의 두 감독은 첫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김 피디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세 감독이 남긴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 피디는 유서에서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스태프들에게 미안해서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지 상상이 안간다”고 써놓았다. <다섯은 너무 많아>의 안슬기 감독 역시 “사실상 회수되기 힘든 돈인데 모든 인건비를 투자형식으로 돌려 영화 작업에 참가한 스태프들과 함께 고생한 영화다. 그런데 마치 나 혼자 완성한 작품처럼 인터뷰에 나오는 데 죄책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감사 차원의 의례적 인사가 아니다.

한국영화는 ‘미안함’을 자양분 삼아 성장해온 게 아닌가 싶다. 고도의 지적,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영화작업의 특성상 참여인력의 헌신은 필수적이겠지만 많은 스태프들이 적당한 보상 대신 ‘미안함’을 받으면서 일한다. 다음 작품을 하기 위해, 그 다음, 또 다음 작품을 위해 그래서 거칠게 말하면 미안함을 받는 대신 미안함을 건네는 처지가 되기 위해 때로는 객관적으로 억울한 상황까지 마음으로만 삭이며 현장에 머문다.

최근 충무로에서는 감독,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미술감독별로 동업자 조합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태프 처우 개선 등을 통해 제작시스템의 합리화를 꾀하기 위한 제도다. 반가운 소식이다. 이 제도가 정착되더라도 ‘맨 주먹’으로 영화를 만드는 젊은 영화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미안함의 악수가 오갈 것이다. 그러나 이 악수가 제도권에서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은 사라져야 한국영화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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