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종전된 지도 언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명제이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일본에서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다양한 해답을 표출해왔다. 물론 여기에는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 총리의 정치적 행보와 맥을 같이하며 극우 성향으로 전쟁범죄를 미화한 <프라이드> 같은 영화도 있지만, 이치카와 곤의 희생적 휴머니즘영화 <버마의 하프> 이래 태평양전쟁에 대한 반성과 반전의 기운 역시 일본영화 내부에 항시 존재해왔다. <배틀 로얄>의 감독 후카사쿠 긴지의 1972년작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는 냉소적인 제목이 시사하듯, 전쟁의 근원적 모순과 국가 권력의 전횡과 어리석은 폭력의 광기 앞에서 희생당해야만 했던 평범한 일본 병사들의 평범치 않은 이야기로 태평양전쟁의 끔찍했던 실상을 풀어내고 있다. 종전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뉴기니아 전선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불분명한 마지막 행적과 죽음을 둘러싼 진실의 실체를 생존한 전우들의 증언을 통해 추적하는 전쟁 미망인의 이야기인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상기시키는 플래시백 내러티브와 핸드헬드 카메라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 촬영, 그리고 기록사진의 효과적 몽타주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치가 지옥의 문턱을 넘나드는 광경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거기에는 기아, 상명하복, 포로살해, 살인, 식인 등 상상할 수 없는 인간지옥도의 군상이 펼쳐지며, 이 모든 추악하고 어리석은 전쟁의 실체 뒤에는 결국 천황과 제국주의가 버티고 있었음을,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일본에서도 변하지 않은 불변의 명제임을 영화는 한땀한땀 보여준다.
<배틀 로얄>의 세계적 성공에 힘입어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들은 최근의 인기를 증명하듯 꾸준히 DVD로 출시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한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는 30여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퀄리티로 출시되었으며, 부록으론 음성해설과 예고편, 그리고 후카사쿠 긴지 연구자인 사다오 야마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배틀 로얄>과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 등 일부 마초주의 영화의 단편으로만 일반에 알려져 있는 후카사쿠 긴지에 대해 본타이틀은 그의 정치적 견해와 더불어 대표작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역사인식의 단면을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상업영화의 전통에서 용감한 반전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황금기 일본 영화계의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는 타이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