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영화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맨은 진짜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는 비서에게 뭐 그런 이상한 제목이 있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니! 그는 유치한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아동용일 듯한 그 소설을 무심하게 읽었고, 놀랍게도 21세기의 <스타워즈>가 될 만한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곱편의 소설, 따라서 일곱편의 영화. 그러나 지난해 여름의 고전을 딛고 다시 겨울방학의 벗이 된 네 번째 영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조금은 위안이 되는, 조그마한 마침표이자 시작점이 될 듯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 전부를 각색한 작가 스티브 클로브는 “이 영화는 이전까지 만들어졌던 모든 것을 마무리했고 새로운 <해리 포터>를 경험하기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믿어도 좋을까.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해리 포터와 불의 잔> 기사에 ‘change’라는 단어를 숱하게 박아넣었으니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도 미덥지 않다면 ‘해리 포터’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증언 또한 첨부한다. “우리가 언제나 이번 영화는 어두워졌다고 말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진짜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훨씬 어둡고 훨씬 무섭다.” 장막을 걷은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무섭다는 세계. 12월1일이 오기 전에, 무엇이 그토록 달라졌는지 들여다본다.
원작소설이 636쪽에 달하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감독과 작가에게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고민의 샘을 안겨주었다. “조앤 K. 롤링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토리를 전개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과 제작비를 지켜야 했다”고 투덜거린 감독 마이크 뉴웰은 영화에 대왕오징어가 나오는지 묻는 초롱한 눈빛의 어린 팬들에게 “대왕오징어는 없단다”라고 비보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처지에 놓인 그는 대신 이야기의 핵심에 주목했다. 고전적인 스릴러와 신화. 뉴웰에게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무구한 선인(善人)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악인(惡人)이 파놓은 함정에서 허우적대는 스릴러이자 그 함정을 이겨내고 영웅으로 성장하는 신화였던 것이다.
살인으로 서막을 여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버논 이모부 가족의 박해를 견디고 호그와트로 돌아온 열네살 해리가 트리위저드에 참가하여 우승하기까지가 주된 기둥이다. 그러나 여기엔 미스터리가 있다. 트리위저드는 학교마다 챔피언 한명을 결정해 내보내는 경기고, 그 챔피언은 열일곱살 이상의 지원자들이 던져놓은 쪽지 중에서 한장을 뱉어내는 ‘불의 잔’이 선택한다. 그런데 ‘불의 잔’은 케드릭 디고리와 해리 포터의 이름을 내뱉는다. ‘불의 잔’에 혼동의 마력을 행사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해리 포터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넣은 것이다. 누가 이 위험천만한 경기에 해리를 내보내고 싶어하는 걸까? 그 답은 덤블도어도 모른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제작사 워너브러더스는 이 방대한 원작을 두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고 한다. “딱히 이야기가 나누어지는 부분이 없어” 무모한 모험은 포기했지만, 한 덩어리인 이 네 번째 이야기는 지금까지 나온 시리즈의 분기점이 되기는 한다. 볼드모트가 부활하기 때문이다. 해리와 더불어 성장해온 배우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이 점을 영리하게 지적했다. “해리와 볼드모트가 만나는 장면은 매우 감정적이다. 해리는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고 이제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4편 이후 <해리 포터> 시리즈의 기반이 될 것이다.” 새빨간 눈동자와 문드러진 코만 남아 추종자들에게 붙어다녔던 볼드모트 경은 원수의 피와 아버지의 뼈를 제물로 바쳐 피와 살과 뼈를 얻는다.
시리즈를 내내 각색했던 스티브 클로브는 뉴웰이 “진정한 서사시”라고 표현했던 비극을 완성하기 위해 공식적인 시나리오를 여덟번 내놓으면서 에피소드를 덜어내고 기워붙였다. 그 과정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볼드모트의 가족사와 이후 정치적인 분쟁을 예고하는 기나긴 에필로그, 집요정을 보호하기 위한 헤르미온느의 캠페인 등이 생략됐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은 껑충거리는 사건의 전개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시리즈의 첫 번째 비극이라 할 수 있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오래된 무덤에 던져진 소년 마법사의 막막한 심정과 죄없는 죽음이 남긴 슬픔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통곡하는 해리 포터. 롤링은 아킬레우스가 능욕당한 헥토르의 시신을 부왕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주는 <일리어드>에서 그 장면의 영감을 얻었고, 작은 어깨가 애처로운 운명의 무게를 지워주었다. 볼드모트의 부활로 새로운 연대기를 예고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이제 진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조앤 K. 롤링은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어두운 정조에 관한 질문에 “나는 여덟살 아이들만 대상으로 삼아 <해리 포터>를 쓴 적은 없다”고 답했다. 그녀는 단지 애초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고 있고, 그 이야기는 해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함께 자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워너브러더스가 오전에 방영되는 아동용 TV프로그램으로 마케팅을 시작하던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올해는 MTV 광고 물량을 늘린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들이 열네살이 된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십대를 위한 영화다. 사내아이들의 티격태격 주먹다짐에서 우아한 자태로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나타난 여자아이들의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론과 헤르미온느 혹은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에마 왓슨의 로맨스에 관한 소문까지, 광속으로 자라난 듯한 성장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의상디자이너 제이니 테마임은 더이상 아역이라고 부르기가 미안해지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배우들을 위해 특수효과 못지않게 공을 들였다. 컴퓨터를 두드리는 이들에게 트리위저드가 승부수였다면, 테마임에겐 크리스마스 무도회가 깔아준 멍석이었다. 그녀는 귀족적인 자부심이 강한 슬리데린 기숙사생들에게는 흰색 타이를 매게 했고, 호그와트 챔피언이어서 첫 번째로 무도회장에 입장할 해리는 예복 아래에 클래식한 검은 조끼를 차려입도록 했다. 가장 공을 들인 의상은 헤르미온느의 드레스였다. “석달 동안 시폰 12m를 써서 만들었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아이들이 감탄하는, 동화 속의 드레스를 원했다.” 지나치게 예뻐 보이지 않도록 언제나 메이크업에 신경을 써야 했던 에마 왓슨은 러플이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보고 집요정의 권익보호 캠페인이 삭제된 아쉬움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춘기는 서툴게 화장을 하거나 거뭇한 수염에 처음 면도날을 대는 설렘만 존재하는 시기는 아니다. 견고한 세계 안에서 나만이 부유하고 있는 듯한 고독, 나는 굳건한데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불안. 래드클리프는 그러한 떨림으로 동요하는 해리의 성장통이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해리는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지만 실패하고마는 남자다. 그 때문에 해리는 심술궂고 적대적인 행동을 일삼고 때로는 놀랄 정도로 이기적이 된다. 또한 해리는 처음으로 덤블도어가 더이상 전능하지 못한 노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요한다.” 트리위저드의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그 못지않은 공포를 극복하고 무도회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십대 소년. 어느 평자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반지의 사자’ 프로도는 데이트를 신청하는 과제까지 떠맡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배우와 캐릭터의 성장이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모습 역시 <해리 포터> 시리즈만의 묘미다. 마릴린 맨슨에게 빠진 래드클리프와 브래드 피트의 포스터를 트레일러에 붙여둔 왓슨, “불공평하게도 론의 예복에만 레이스가 달렸지만, 70년대풍이어서 마음에 들었다”는 장발 소년 루퍼트 그린. 이미 오래전에 변성기를 통과하여 지금은 신장과 이목구비의 변성을 겪고 있는 이 아이들만을 염두에 둔다면 <해리 포터> 4부의 부제로는 <애들이 커졌어요>가 걸맞을 것이다. 또는 영국 영화잡지 <엠파이어>의 어느 대목을 빌려 <해리 포터: 아메리칸 파이의 역습>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