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로라공주>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로라 공주>는 피눈물을 흘릴 만한 상실을 영화의 핵으로 취한다. 영화는 여자 복수극, 정확하게는 딸을 두었던 엄마의 복수극이다. 6살짜리 딸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되어 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진 사건 이후 펼쳐지는 초강 복수극이다. 외제 자동차 딜러이자 싱글 마더인 정순정(엄정화)의 지극히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살해 동기가 밝혀지기 전, 영화는 몇개의 연쇄살인사건을 보여준다. 예컨대 양딸을 백화점 화장실에서 구타하던 여자는 하드고어 피범벅이 되어 죽는다. 밥을 늦게 배달한 식당집 아주머니를 하대하던 여자는 고급 스킨 클리닉에서 석고 팩을 받다 말고 질식사로 죽는다. 그녀의 나이 들고 느끼한 남자친구는 멋대로 여자를 유혹하다가 독극물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는 늘 바람이나 피우며 놀러 다니지만 부유하다.
여기까지 영화는 이들이 연쇄살인을 당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황적 증거는 있다. 이들은 사회적 혐오의 대상으로 영화 속에 자리잡는다. 물론 잔인한 죽임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인지가능하고 공감가는 사회적 적대감을 이렇게 영화의 전반부에 가동하는 것은 모성 복수극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오로라 공주>에 좀더 확대된 관객의 지반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모성을 체감할 만한 일정한 연령대의 여자관객만이 아니라, 사회적 적대감을 지닌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함께 특권화된 관객의 위치에 초대하는 것이다. 그 위치에 서서 보면 연쇄살인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전혀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펀드매니저를 공공의 적으로 설정한 영화 <공공의 적>이 구사한 전략도 바로 이 사회적 적대의 동원이었다. <오로라 공주>는 젠더와 계급의 위계, 차이의 상층을 점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를 영화 초반부에 일찌감치 설정해 관객이 선뜻 들어설 수 있는 윗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동시에 이들을 살해하는 정순정의 사정을 헤아릴 공간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성의 멜로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과는 달리 모성의 스릴러 <오로라 공주>가 말 걸려는 대상이 물론 여자관객이 주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여성관객에게만 말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강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하다.
이 엄마의 여성성은 어디로 갔을까
위의 사회적 적대감을 초반부에 설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영화에 이중의 긴장 혹은 궁금증을 부여한다. 혐오의 대상일 수는 있으나 죽어야 될 정도는 아닌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은 정신병자일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연쇄살인을 당한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저지른 공통적 범죄란 무엇일까? 이 긴장은 관객이 <오로라 공주>에 초반 감정 투자를 할 수 있는 좋은 장치다. 그러나 곧 밝혀지듯이 이상의 것들은 사실 영화의 오로라 혹은 아우라를 만들어주는 껍질과도 같다. 살인이 연쇄(시리얼 킬러)로 번진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시퀀스는 이 영화의 핵에 해당한다. 엄마가 혼자 양육하고 있는 6살짜리 소녀,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받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가 납치되는 장면은 참혹하다. 그리고 이 장면은 즉각 심각한 사회적 함의를 띠게 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싱글 마더가 처한 곤궁 그리고 엄마가 일하는 사이 아이가 부딪쳐야 하는 일상의 위험들. 싱글 마더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회적 공공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돌보아줄 친지도 돈도 없는 모녀의 위태로운 일상이 그려진 이 시퀀스는 깊은 연민을 갖게 한다. 또 이 시퀀스에 연쇄적으로 배치된 사람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끝까지 도와주었더라면 소녀의 죽음만이 아니라 이후의 연쇄살인이 방지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형사적으로 보자면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미필적 고의, 과실치사 그리고 인식 있는 과실 등을 저질러 6살 소녀의 죽음을 공모했던 것이다. 이 시퀀스 이후 스릴러로서의 <오로라 공주>가 끝나고, 신파(난 절대 신파를 폄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로서의 그것이 시작된다. 스릴러는 기본적으로 사건에 대해 회의하고 추리하며 때로는 가치 평가하는 일련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거치는 반면, 신파는 기본적으로 몸과 정동을 중심으로 한 (비)언어적 윤리의 드라마다.
<오로라 공주>는 영화를 거의 반분해 스릴러와 신파를 배치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장르적으로 반분되었다고 생각이 미치는 그 지점 뒤에 다시 계산된 행동을 논리적으로 펼쳐낸다. 즉 스릴러의 도입, 신파적 개입, 다시 회복된 스릴러로 구조화된 것이다. 이러한 장르적 믹스는 엄마의 복수를 다루는 영화에서 특히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스텔라 달라스>와 같은 모성의 멜로드라마가 자식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드라마라고 한다면, <오로라 공주>는 이미 남편도 아이도 없는 텅 빈 집, 그렇게 집을 비우게 한 원인 제공자를 찾아 복수하는 이야기다. 이 복수도 희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복수의 과정에서 정순정은 딸만을 위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에고의 분열이 일어나 딸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 막스 오퓔스의 1949년작인 <무모한 순간>(reckless moment)에서의 어머니는 딸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고 그 사체를 몰래 버린 뒤 공갈협박에 시달리지만, 그녀를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으로 인지하게 되는 바로 그 협박범의 도움으로 사지를 빠져나온다. 그래서 <무모한 순간>은 모성애와 섹슈얼리티가 얽혀드는 까다로운 서사와 스펙터클을 취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인 정순정이라는 인물에는 모성을 제외한 다른 여성성은 투사되어 있지 않다. 다른 남자들과의 유혹 및 섹스 행위는 그들을 상처내기 위한 도구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옌볜 처녀나 매우 쿨한(사실은 노심초사하면서도) 카딜러 그리고 정신이상자로 변장하고 있다. 반면 전남편인 오성호(문성근)와의 섹스는 수동적이다. 정순정이 적극적인 행위자로 나설 때는 ‘나 민아 엄마야!’라며 딸의 복수를 하는 엄마로서의 순간이다.
왜 정순정에게 여자친구 하나 없을까?
정순정 역을 하는 엄정화는 노력을 기울여 연기하며 강력반 형사 오성호의 무기력하다가 갑자기 민완해지는 연기도 일품이다. 딸 역을 맡은 6살짜리 소녀가 눈물에 젖은 채 예의 서울 거리를 걷는 장면도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곳곳이 위험에 처한 서울의 풍경 묘사도 <텔미썸딩> 이후 오랜만에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서 떠나지 않는 질문은 왜 정순정에게는 여자친구 혹은 조력자 하나 없는가 하는 점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경과야 어찌됐건 금자의 복수극을 도와주던 그 많던 여자 조력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로라 공주>에선 친구인 듯 등장한 여자가 정순정에 의해 곧 살해되고 난 뒤 이 질문은 좀더 목소리를 키운다. 이제 이 질문을 우회해 들여다보자.
한마디로 영화에서 모성은 사무치는 그 무엇이다. 여주인공 이름처럼 정말 순정의 그 무엇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모성,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귀하게 다루면서 엄마와 딸의 관계, 엄마로서의 여자를 제외한 다른 여성들, 여성성에 이상한 무의식적, 의식적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의아하다. 영화에서 남자들만 여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계층이 다른 여자들은 서로를 하대하고 경멸하고 돌보지 않고 죽인다. 정순정 자신에겐 엄마도 여자친구도 없다. 영화는 모녀를 제외한 여자들끼리의 연대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도 시사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억지춘양으로 여성들간의 차이보다는 연대를 강조하는 영화가 더 여성주의적이라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로라 공주>에 이러한 결정적 부재의 징후가 있다고 말하는 중이다. 이 부재가 사회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을 수는 있으나 , 그 부재로 말미암아 영화는 이혼한 남편 오성호의 무력한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쪽에 다른 무게중심이 실리게 된다.
이제 난 알아요. 아빠의 마음을?
그래서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것은 영화 내내 흐르는 딸의 노래 가사다. 민아의 테마라고 알려진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제 난 알아요. 아빠의 마음을. 인생은 혼자라고….’ 왜 엄마 정순정은 이혼한 뒤, 오로라 공주를 좋아하는 6살 난 딸에게 아빠에 대한 노래를 계속 부르게 했을까? 별명이 오로라 공주였다면 바로 그 오로라 공주 관련 노래를 부르거나, 부르게 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을까? 노래 가사가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살해될 아이가 그 노래를 부르고 영화 내내 그것이 흐르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아빠가 없는 상황에서 어린 소녀로 하여금 엄마 옆에서 위와 같은 노래를 계속 부르게 하는 것은 치유적이라기보다는 도착적이다. 딸을 목욕시키는 장면에서 정순정은 부드러운 톤이기는 하지만 딸을 나무라면서 벌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한다. 그때도 딸은 노래를 부른다. 액면 그대로 보자면 딸이 늘 부르고 있는 노래는 이미 연행성의 맥락에서 보자면 처벌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보면 복수혈전을 부르는 예의 사무치는 모성애는 사회적 도움없이 아이를 양육해야하는 싱글 마더에게 사회가 거꾸로 가지라고 종용하는 죄의식이 치환된 양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순정에게 그토록 과잉 모성애가 부여된 반면 그녀의 섹슈얼리티나 다른 여성과의 관계는 괄호 쳐지거나 변장의 양태로만 드러나는 것일 것이다.
영화는 복수를 감행하는 강력한 모성과 미래의 목사를 꿈꾸는 형사 아버지의 허약과 무책임을 대비시키면서 실패한 가부장을 비판하고, 엄마의 정의구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패한 시스템을 노출시킨다. 위의 몇 가지 의문에도 불구하고 <오로라 공주>는 여성감독이 여성에 관한 이슈를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진단한 성공적인 대중영화다. 용감하고 짜임새 있는 데뷔작을 만든 방은진 감독과 영화를 만든 모두에게 축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