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아무 것도 되기 싫은 남자, <소년, 천국에 가다>
2005-11-30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새로운 남성주체/욕망’의 징후적 출현 <소년, 천국에 가다>

※이 글은 허문영(446호)의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과 정승훈(448호)의 “한국영화의 ‘소년성’ 진단과 김기덕, 페미니즘 논쟁에 덧붙여”의 보론으로 읽히길 바란다.

<소년, 천국에 가다>는 소년성장영화가 아니다. 소년은 처음부터 성장돼 있었고, 다만 외양이 급격히 나이 먹다 죽는데, 이는 한 애늙은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봐야한다.

애늙은이의 ‘완벽한 개인되기’ 프로젝트

맹인가수 이용복의 71년 번안곡 <1943년 3월4일생>이 흐른다.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다짐할 대한남아에게 이 무슨 퇴폐적 자의식인가? 가수가 비장애인이었던들 필경 금지곡이 되었을 터이다. 자신을 대한의 아들, 누구의 제자,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어머니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인식하는 이 노래의 자의식은, ‘미혼모 아들의 미혼모 남편-되기’ 프로젝트를 통해 ‘아버지의 법’ 바깥에서 ‘사적(私的) 존재-되기’를 열망하는 영화의 불온한 꿈을 항변한다.

네모는 세상의 처세와 달리 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어른스런 사생아(私生兒)다. 연탄을 갈기 위해 학교를 안가고, 가수나 영화배우로 자아실현을 꿈꾸는 게 아니라 미혼모 남편이라는 사생활을 꿈꾼다. 성인이 된 뒤에도 직업없이(<빅>의 주인공은 장난감 회사에 취직한다) 어머니 금고의 돈을 꺼내 쓰며 부자와 연애하고 기철의 형처럼 놀아준다. 성인이 된 후 도리어 가부장성은 탈각되는데, 본적도 없는 아버지를 차용하여 유아적 행동의 변명으로 삼는다(“고문으로 머리가 이상해졌으니 이해하라”). 그의 아버지는 몽상의 산물이자 (전 오이디푸스기로의) 퇴행의 빌미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 “무능하고 간섭이나 하는 아버지는 필요없다”고 직언해버린다. 그는 단 한명의 여자친구가 있을 뿐 사회적 관계도 소속도 없다. 공동체의 영웅은커녕, 부자의 애인이자 기철의 양아버지라는 정체성만으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자 ‘숨어있기 좋은 방’에 들어가 홀로 죽고자 한다. 그가 꿈꾸는 천국은 사랑하는 여자와 계속 뽀뽀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찌감치 철든 애늙은이가 사회적 존재-되기를 거부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완벽한 ‘사적 존재-되기’를 실현코자하는 욕망의 재현이다.

이를 <사랑해, 말순씨>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 남다은이(526호) 아쉽다고 지적한 모자의 수평적 관계의 가능성은 네모모자에게서 제대로 그려진다. 광호가 은숙을 어머니와는 다른 존재, 즉 성적 판타지로 향유하다 성인남자의 그림자에 좌절하던 것과 달리, 네모는 부자를 어머니와 동질하게 이해하고 그녀의 성기만 바라보는 자들에 대항한다. 단점까지 수용하는(“아지메, 무섭소”) 그의 사랑은 그녀의 승인을 얻는다. 공연히 독재자의 도상을 소비하며 정치적 피해의식을 들추는 <사랑해, 말순씨>와 달리, “아버지가 민주투사가 아니라, 착실한 사람이었다면…”에서 보듯, 민주투사를 ‘착실한 사람’의 반대말로 인식할 만치 정치로부터 초탈해 있다. 광호동생은 누가 돌보는지조차 도외시되지만, 기철은 네모의 삶과 죽음에 결정적인 존재이고, 불행을 떠넘기려 애쓰던 광호와 달리, 네모는 “그럼 기철이는요? 그리 살지 마이소”라 민주투사를 타이른다.

사적 남성 주체라는 희망적 대안

‘시대적 억압 속의 소년의 성장’이란 뻔한 도식의 <사랑해, 말순씨>와 달리, <소년, 천국에 가다>는 ‘사적 존재-되기’라는 전혀 다른 욕망의 탈주선을 보여준다. 아무런 사회적 존재도 되고 싶어하지 않는 남성주체의 출현은, 출산파업처럼 이 사회의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를 미워하며 답습하는 남성주체의 삶에 균열을 내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섯은 너무 많아>가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의 외부에서, 여성주체의 ‘창녀-되기’나 ‘레즈비언-되기’가 아닌 ‘대모-되기’를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소년, 천국에 가다>는 새로운 천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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