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 번째 작품 <광식이 동생 광태> 만든 김현석 감독
2005-12-02
글 : 박은영
글 : 서지형 (스틸기사)
“난 좋게좋게 살자, 길이 험하면 가지 않는다, 주의다”

작품이 창작자의 인격이란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를 만든 김현석 감독은 수줍지만 따뜻하고, 썰렁하지만 재밌고, 감성은 올드하지만 재기는 번득이고, 널널한 듯 보이지만 은근히 치밀한, 그런 사람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그런 감성, 유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나요?”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김현석 감독의 영화들이 그의 성격과 취향과 경험에서 빚어진 것을 알겠다. 그중에서도 캐릭터와 스토리가 현실에 가장 가까이 내려앉아 있고, 친한 친구들의 이름부터 그 자신의 연애의 추억과 소소한 일화까지 반영했다는 <광식이 동생 광태>는 김현석 감독을 가장 많이 닮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김현석 감독은 대학 시절 처음 쓴 시나리오 <사랑하기 좋은 날>이 영화화되는 행운을 안았다. 두 번째 시나리오 <대행업>까지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자, 참신한 이야기꾼을 찾던 충무로의 프러포즈를 받는 몸이 되었다. 그중 여러모로 코드가 맞았다는 명필름에서 여러 해 동안 ‘직원’이라는 오해를 사가며,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각본과 연출부, <공동경비구역 JSA>의 각색, <섬>의 조연출을 거쳐, 자작 시나리오 <YMCA 야구단>으로 연출 데뷔하기까지, ‘책상’과 ‘현장’을 바삐 오갔다. 그가 작가로,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들은 야구장을 배경으로 했거나 야구를 소재로 한 것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공통분모는 수줍은 남자들의 순정을 그린 로맨틱코미디라는 점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임했다는 <광식이 동생 광태>는 ‘야구’가 아니라 ‘남자의 연애’에 집중한 이야기. 자신을 비롯한 세상 모든 남자들의 분열된 자아라는 ‘광식이와 광태’에 대해, 작가로서 감독으로서 ‘소신’을 갖고 주력하는 장르 로맨틱코미디에 대해, 그의 솔직발랄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차기작으로 선동열 선수에 관한 영화를 계획했다가, <YMCA 야구단>으로 KBO에서 감사패를 받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방향을 선회했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

=<YMCA 야구단>이 크게 됐으면 맘 편히 했을 텐데, 잘 안 됐다. 대외적으로 160만명 정도? 대학원에서 선동열 선수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현승 감독님한테 밉보였는지 80점을 받았다. 대학원에서 80점이면 D학점이다. (웃음) 이래저래 밀고나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스포츠영화가 크게 흥행한 적이 없던 것 같긴 하지만, <YMCA 야구단>은 어떤 점을 고려하든 내 기대에 못 미쳤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마음 편히 해보자, 하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됐다. 심재명 대표님하고도 특이한 남자 캐릭터가 나오는 ‘작은’ 영화를 해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얘길 해야 할지 몰라서, 6개월 정도 그냥 흘려보냈다.

-<광식이 동생 광태>라는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이야기의 방점은 광식이에 찍혀 있고, 형제 이야기인 점을 감안해도 ‘광식이와 광태’라고 이름 붙여야 옳을 텐데, 왜 ‘광식이 동생 광태’가 됐나.

=술자리에서 황정민씨를 보고(<YMCA 야구단>에서 류광태 역할) 제목만 먼저 떠올렸다. 직관적으로 떠올랐다고 할까. 앞에 ‘광식이 동생’이 붙으니, 동글동글한 어감이 생겨서 마음에 들었다. 비중상으로 광식이보다 광태가 몇신 더 나오는데, 초기 시나리오엔 광태 비중이 더 컸다. 광식이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적게 나와도 강렬한 인상을 주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광식이를 통해 광태가 깨달음을 얻으니까. 실제로 광식이를 곁에서 보고 겪으면서, 밀기만 하던 광태가 당기기도 하는 변화를 보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트릭 같은 제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10고를 거치는 동안 이야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초고는 어떤 이야기였나.

=광태 형 광식이를 사랑에 실패하는 마흔살가량의 노총각으로 설정했다. 영화에도 넣었듯이, <졸업>의 패러디를 끌어오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신부 낚아채는 남자 말고 멍한 표정으로 스쳐가는, 신부를 빼앗긴 남자의 입장, 그의 사연을 풀어가고 싶었다. 초고에선 광식이를 <펀치 드렁크 러브>의 애덤 샌들러처럼 자폐적이고, 표정이 없는 인물로 그렸다. 그러던 광식이를 통해 광태가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인데, 뒤에 가면 홍수가 나고 다리가 끊기고 태권V도 나타나는 판타지가 된다. 초고를 무척 힘들게 썼는데, 몇몇 에피소드는 나중에 거장이 되면 부품처럼 갖다쓸 생각이다.

-애초 광태로 염두에 뒀던 김주혁이 광식이가 되는 등 캐스팅에도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광태에 가까운 줄 알았다. 그래서 동갑인 주혁씨를 광태로 염두에 두고 있었고, 광식이로는 최민식 선배님 연배의 배우를 생각했다. 그런데 심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감독님, 노총각이거든요.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 만큼 상큼한 느낌이 나야 하고, 그러려면 연령대를 낮춰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처음 구상과 달리 주혁씨에게 광식이 역할을 제안하게 됐다. 광식이가 연애에 실패하는 남자이긴 하지만, 칙칙한 느낌이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관객이 역설적으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배우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허우대 멀쩡한’ 주혁씨에게 제안하게 됐다. 광태는 반대다. 바람둥이하면, 으레 꽃미남과를 생각하는데, 그게 스테레오 타입이더라. 처음 태규씨 얘길 듣고, 어떤 광태가 나올지 감이 안 잡혔다. 그만큼 비전형적인 광태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윙크 한번 하면 다 넘어오는 그런 매력남이 아니라, 수가 빤히 보이고 어설프지만 귀여운 바람둥이. 광태는 ‘봉태규식 바람둥이’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드라마를 ‘광식이’,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세 챕터로 나눠 진행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염화나트륨이란 게 있지 않나. 염소와 나트륨처럼 서로 다른 두 케이스를 따로 보고, 합쳐서 놓고 보니 ‘염화나트륨’이 됐네, 하는 효과를 주고 싶었다. 정, 반, 합의 구성이랄까. 시나리오 쓰다가 잘 안 풀려서, 에피소드를 인물별로 몰아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이어서 밀고 가게 된 것도 있다. 사실 모든 남자 안에는 광식이와 광태가 공존한다. 태규가 나보고 ‘광식이가 되고픈 광태’라 그랬다던데, 반대 아닌가? 놀 때는 광태스러운데, 어디 가면 광식이인 척한다고 놀리는 말이었나보다. 그건 광식이나 광태도 마찬가지다. 광식이가 아무리 윤경이를 짝사랑했다 해도, 나이트클럽 가면 여자한테 수작 걸고 그랬을 거다. 남자가 다 그렇다.

-광식이와 광태, 양극단의 연애 방식을 접하고 나면, 이들을 절충한 일웅의 케이스가 일종의 해답처럼 여겨진다.

=그런 반응이 많다고 알고 있다. 광식이와 광태가 반씩 섞인 인물이 일웅이고,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일웅이의 방식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매사 절충하고 중도를 걷는 인물, 재미없지 않나. 마케팅 과정에서 ‘여자들이 연애할 때 남자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라는 컨셉이 강조되니까, 관객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남자들이여, 삽질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였다. 모든 삽질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거니까.

-인물도, 에피소드도 리얼한 반면, 클라이맥스인 결혼식 장면은 판타지풍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스포일러 있음) 제작진 내부에서 약간 논란이 됐던 장면이다. 이 결혼식은 형제에게 큰 의미가 있다. 광식이로서는 짝사랑을 떠나보내는 자리이고, 광태는 자기랑 똑같은 놈인 줄 알았던 친구가 먼저 깨달음을 얻었구나, 느끼는 계기가 된다. 처음부터 이 장면은 판타지처럼 보였으면 싶었고, 그래서 일부러 <영웅본색>풍으로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건 어쩌면 형제의 환상일 수도 있다. 결혼식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중요했고, 그래서 판타지 느낌을 밀고 나갔다.

-남성작가이자 감독으로서는 드물게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주력해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고 엄청 감동받았다. 당시에 짝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민(안성기)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됐고, 보면서 많이 울었다. 영화가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 수 있구나, 영화가 가진 감정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뒤 20년을 영민이 혹은 광식이로 살았던 것 같다. 나의 20대를 지배한 고민은 ‘시대’도 ‘영화’도 아니고, ‘여자’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남녀관계를 즐겨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 원래 말랑하고 미세한 감정을 좋아하는데다 낙천적인 편이기도 하다. 당성으로 따지자면, 자민련이다. 좋게좋게 살자, 길이 험하면 가지 않는다, 주의다. 광태 친구들의 ‘잠실본동 나라를 걱정하고 풍류를 사랑하는 청년들의 모임’이 내 친구들 얘기다. 워킹 타이틀 영화도 진작부터 좋아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영화계는 소신을 갖고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든 분위기다. 로맨틱코미디가 고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나.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잘하는 걸 하자는 생각으로 <광식이 동생 광태>로 돌아오게 된 거다. 신승훈과 윤종신이 결국 발라드로 돌아온 것처럼.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최민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임창정, <YMCA 야구단>의 송강호,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주혁으로 이어지는 남성 캐릭터의 계보가 있다. 소심하고 순정적인 남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내가 그들처럼 소심한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나는 사람 좋아하는 O형이란 말이다. 덜 사회적이고 엉뚱하면서, 따뜻한 낙관주의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광태는 좀 별종이지만.

-작가로 시작해 감독이 되었는데, 언제 처음 영화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나.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감독을 꿈꾸긴 했다. 선뜻 연극영화과에 갈 수가 없어서 경영학과에 다니긴 했지만, 영화서클 활동을 더 많이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생각해보니, 2년 반이나 영화패 활동을 했는데, 영화 한편 만든 게 없다는 게 좀 억울하더라. 그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 작품(<사랑하기 좋은 날>)이 공모에서 당선됐다. 그 다음이 <대행업>이라는 시나리오였는데, 영화사에서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미팅한 영화사 중에서 당시 명필름이 나와 제일 잘 맞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연출부를 할 때 이은 감독님은 내게 계속 존칭을 쓰셨는데, 나도 연출부들한테 말을 못 놓는 성격이다. 명필름에서 시나리오 쓰고 하면서, 연출의 뜻을 비쳤더니, <섬>의 조연출을 하도록 주선해주셨다. 이은 감독님이나 김기덕 감독님과 일하면서, 빨리 찍는 훈련은 확실히 했다. 나도 빨리 찍는 편인데, 내 경우는 좋게 말하면 순발력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준비 부족이다.

-작품들을 보면 감독 특유의 색깔이 있다. 다소 올드한 정서도 그렇고, 생뚱맞은 유머도 그렇고.

=원래 자기 성격대로 인물이 나오고 영화가 나오지 않나. 특별한 개인기는 없지만, 남들 하는 건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창작자로서 힘든 일이, 장르영화를 하면서 생경한 방식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지향한 바이기도 했는데, 때로 어정쩡한 타협을 시도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장진 감독 영화는 처음엔 다들 낯설어했지만, 결국 감독 주도로 관객이 코드를 맞춰가게 되지 않았나. 내 얘기엔 관객이 어느 정도로 공감할까, 늘 고심이 된다.

-감독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여성 캐릭터가 모호한 편이라 그 부분이 늘 아쉽다.

=객체화돼 있는 거 맞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이번엔 특히 남자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라 그렇다. 일반적인 스크루볼 로맨틱코미디는 남녀가 동등한 파워와 비중을 갖지만, 이 영화에선 다르다. 특히 윤경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철저하게 객체화하기로 한 거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봐도, 황신혜 캐릭터는 ‘제대로 인형’이다. 광식이에게 윤경도 같아서, 그저 짝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그 판타지가 깨지면 안 되는 거다. 모든 남자들이 광식이와 같은 시절을 보내는데, 윤경을 이해하는 순간, 윤경은 더이상 윤경이 아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안 된다고들 하잖나. 나도 <YMCA 야구단> 끝내고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만난 걸 후회했다. 내 인생의 윤경이 한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이번 영화에서는 야구 에피소드에 대한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나.

=이런 질문 받기 싫어서, 일부러 안 넣었다. (웃음) 사실 야구 얘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데이트 때 <길>을 보고 나오던 광태와 경재가 싸우는 장면에서, “울어본 적이 있긴 하냐”는 경재의 질문에 광태가 “이종범이 일본 가서 다쳤을 때”라고 답하는 설정이 있었는데 뺐다. 광태 방에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김종필 휘호 옆에 이종범 선수 사진을 걸어두긴 했는데, 화면에 잘 드러나진 않았다.

-차기작으로 예정된 것이 있나.

=이번에 결과가 좋으면, <광식이 동생 광태2>를 만들까 한다. 광식이와 광태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는 거다. 광태는 경재에게 집착하고, 광식이는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고, 이런 식으로. (웃음) 아직 차기작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다. 요즘은 남이 몰라주는 소신은 필요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선 절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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