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여배우를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데는 영화와 관련된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린 시절부터 차분히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할리우드 키드’와는 거리가 먼, 활달한 성격에 운동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나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책과 음악, 영화에 탐닉하기보다는 학교 대표로 응원단에 참여하던 나였다.
이렇듯 내 인생의 영화, 아니 내 인생의 여배우를 전혀 꿈꿀 수 없었던 나의 인생에서 영화와의 첫번째 조우는 1996년이었다. 이른바 ‘잘 나가던 약장사’(제일제당 제약사업부)에서 하루 아침에 엔터테인먼트 사업부(현 씨제이엔터테인먼트)로 발령을 받은 나는 매주 토요일 오전 집사람과 어린 딸들을 이끌고 극장주를 찾아다녔다. 씨제이가 영화사업을 하던 초창기라 “저희 영화 하루만 더 걸어주세요”라며 사정하고 다니던 나에게 ‘영화’란 업무 스트레스를 강요하던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여배우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있던 1999년 겨울, 영화를 새롭게 보게 했고 나아가 내 인생의 활력소가 된 한 배우를 만나게 되었다. 미나 수바리. 1979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생. 10대 소녀의 모습에 팜므 파탈의 도발적인 눈빛을 가진 그녀. 그녀의 간단한 프로필만을 얘기했을 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아메리칸 뷰티>에서 장미꽃이 흩날리는 판타지 목욕 장면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면 백이면 백 모두 떠올리는 그녀가 바로 나의 연인 미나 수바리이다.
모든 사람이 알만큼 강렬했던 그녀의 캐릭터는 내 심장의 휴화산을 다시 폭발시켰고, 내 머리 속에는 철필로 새긴 듯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영화를 보기 한해 전 <피스 메이커> 미국 정킷(해외 언론을 대상으로 한 주연배우 인터뷰 행사)에서 니콜 키드만을 보았을 때 가졌던 흥분과 환상은 <아메리칸 뷰티> 한편 보는 것으로 하드 디스크 포맷 시킨 것처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정도다.
영화 속 케빈 스페이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뭔가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고, 그녀를 통해 영화가 업무뿐만 아니라 나의 삶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영화 속 장면에서 케빈이 딸의 친구에 잘 보이려는 수컷의 본능을 발견하는 순간, ‘언젠가도 나는’ 하며 정신적 일탈(?)을 꿈꿨던 두 딸의 아버지인 나였지만 현실 속에서 일탈의 결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없이-물론 그런 용기도 없었지만- 내 상상 속에서 내 마음대로 스토리를 이리저리 구성해 보면서 잃어버렸던 나만의 본성을 찾을 수 있게 했던 그녀. 그리고 주변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나만의 내적 세계에 머물렀던 그녀가 있었기에 이후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4년 여의 시간 동안에도 신문 사회면이나 방송 뉴스에 나올 일 없이 착실한 ‘기러기 아빠’로 남을 수 있었다.
그녀가 일깨워준 나의 판타지에 대해 주변에서는 ‘원조교제’와의 유사성 운운하며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떳떳하게 하고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드림웍스 영화를 배급하던 회사 업무 때문에 알게 되었던 ‘팜므 파탈’ 그녀는 내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에 우리 가족을 지켜주었던 ‘수호천사’ 역할을 한 것이다. 정신적이든 현실적이든 누가 우리 사이를 일탈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본 그녀의 인물검색에서 그녀의 이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녀는 세계의 많은 유부남들의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5년 후 다시 그녀의 인물정보를 찾아볼 때는 행복한 그녀의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