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엄마에게 칼을 권하는 사회
2005-12-01
글 : 임인택

(*영화의 중요한 반전을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 넘어가, 길 잃은 애기를/어머니가 부르시면/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앞으로 다가오며/그 가슴 속 켜지는 불로/애기의 발부리를 지키고/……/애기야/…/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영원과, 그리고 어머니뿐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 <어머니>다. 모성애의 힘, 실로 대단하다. 자연조차 모성애의 완성을 위해 무릎 꿇고 도열한다.

<오로라 공주>의 정순정(엄정화)이 유괴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건장한 사내들을 포함, 유괴 정황에 직간접적으로 조력한 여섯 명을 너끈히 살해할 때도, <6월의 일기>의 서윤희(김윤진)가 ‘왕따’ 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엄마의 자식들일 다섯 아이의 숨줄을 가차없이 갈랐을 때도, “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 앞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닐지언정 최소한 우리는 두 엄마들에게 그렇게 감정이입되어 다가가고 살인의 정당성도, 영화의 개연성도 꽤나 인정해버리고 말 터. 바로 엄마이질 않는가.

영화를 본 뒤 며칠 사로잡혔던 의문은 이렇다. ‘엄마들은 모두 옳은가, 그리고 강한가.’ 만일 정순정의 딸아이가 나도 모르게 어깨라도 부딪히곤 넘어져서 하필 그 택시(택시 기사, 죽는다)를 타야 했다면, 서윤희의 아들과 같은 반이라면 왕따의 주동자는 아니더라도 이도저도 손 못쓰는 ‘방관자’(방관자, 죽는다)쯤은 되었을 텐데, 나는 영화 전개 상 황천길을 걷게 될 공산이 큰 것이다.

이들 엄마의 캐릭터 뒤로 우리 사회의 음습한 그림자가 보인다. 초인에 가까운 엄마를 더 많이 요구할수록, 이들 영화의 현실성이 더 크게 다가올수록, 이 사회가 더 절망적임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끝나는 절망적 상황에서 내게만 향해지는 ‘신화적 도움’의 실체가 바로 ‘엄마’다. 요즘 영화에 나오는 강력한 엄마들은 ‘원형적 또는 신화적 엄마상’으로 볼 수 있다.” 주목할 건, 세상의 도움은 이미 끝났다는 점이다. 사회의 살벌한 무관심에 의해 순정과 윤희가 이미 자식을 잃은 뒤 영화가 시작되는 대목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엄마의 복수가 절대자의 것처럼 정당, 강력해지고 심지어 복수의 칼끝이 현실 속 나약했던 엄마에게까지 가닿는 것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지난달 개봉한 <플라이트플랜>의 <뉴욕 타임스>(9월23일치) 리뷰 기사 말머리는 이랬다. “다시 태어날 땐 조디 포스터가 내 엄마가 되면 좋겠다. (미안, 엄마)” 서로 무관심한 비행기 안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 카일의 분노는 여느 기내 전문 액션 배우를 능가하는 체력과 기지를 내뿜게 한다. 다행히도 터미네이터처럼 아수라를 뒤로 한 채 딸아이를 무사히 안고서 나오지만, 혹여 딸을 잃었다면 그는 순정이 될 텐가, 윤희가 될 텐가.

그래서 나는 다음 생의 내 엄마가 정순정, 서윤희가 되길 원치 않는다. 최병건 정신전문의의 말마따나 “모성이란 숭고한 가치로 인해 개운한 폭력, 공감할 수 있는 폭력”을 만들어 보일 뿐이고, 이런 폭력을 필요로 하는 절망적 사회에서 내가 또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됨을 예고할 뿐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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